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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08호)ㅣ명량해전 이후 처음 맞는 판옥선 진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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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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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이후 처음 맞는 판옥선 진수식

국정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PGM연구소 책임연구원

새로운 전선을 낙괴했다는 말의 의미

 

우리가 아는 판옥선은 1555년 을묘왜변 당시 만들어져 이후 조선의 주력 함선이 되었는데,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판옥선은 이순신의 조방장이었던 정걸 장군의 걸작이라는 언급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군관 나대용에 의해 3척이 건조되어 제2차 출전한 사천해전에 처음 참전하였는데, 이는 각각 좌수영귀선, 방답귀선, 순천귀선으로 불렸다.

 

난중일기에는 왜란 중 판옥선의 건조에 관한 실마리가 두 군데에 나온다. 먼저 계사년(1593) 6월 22일, 한산도로 진(陣)을 옮기기 전이다. 이순신은 고성 미륵도의 걸망포에 머무르면서 한산도에 좌괴(坐塊)를 하는 일로 각 부대에서 인부 214명을 뽑아 보냈다. 이튿날에는 새 함선에 쓸 밑판(本板)을 만드는 것을 마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14일 후인 7월 6일, 한산도에서 새로 만든 배를 끌고 오는 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걸망포의 진을)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판옥선 한 척을 만드는데 소나무를 베어 상가대(받침목 위)에서 배의 밑판을 붙이기 시작하여 상장과 청판, 돛대를 올려 다 만든 새 배를 끌어오는데 약 15일이 걸렸으니, 여름철 판옥선 한 척 건조에는 약 20~30일 정도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무술년(1598) 1월 2일, 새로운 전선을 낙괴(落塊)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민웅 역주의 <이충무공전서>에는 ‘배를 만들 곳에 땅을 고르고 받침목(塊)을 앉혔다’는 의미로 추정하여, 좌괴(坐塊)와 같은 말인 듯하다고 보았고, 최주환 역주의 <초서체 난중일기>에서는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했다’고 번역했다. 낙괴를 진수(進水)로 본 것이다. 노승석 역주의 <난중일기 교주본>에도 ‘새로 만든 배를 토괴에서 내렸다(완성)’으로 적었다. 이순신이 적은 ‘낙괴(落塊)’는 배를 받침목(塊)에서 내려 떨어뜨리는 것(落)이니, 배의 완성이자 진수식이 맞는 표현 같다. 시기적으로도 고하도로 진을 옮긴 후 장병들의 막사를 먼저 짓고 나서 여러 섬의 소나무를 베어 함선을 건조했을 것이고, 또 계사년 여름과 달리 겨울철의 함선 건조는 추위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을 것이므로 대략 50~60일 정도에 걸쳐 새로운 판옥선을 완성하여 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판옥선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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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各船圖本전선도(戰船圖)

지금 우리나라는 함정(艦艇) 건조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첨단 이지스함과 3천톤급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전투함인 판옥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다만 일본의 전선인 아다케부네와 세키부네보다 전투력이 좋았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정유재란 당시의 판옥선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얼마나 큰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었을까? 판옥선의 크기는 18세기 말 정조 시대 <각선도본>의 전선(戰船)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이보다 작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대략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타고 호령했을 가장 큰 판옥선(上船)은 길이가 20m 정도(19.7~21.2m)였고, 예하 장수들이 타는 일반적인 판옥선은 16m 정도(15.2~16.6m)였다고 본다. 지금도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 가면 함선과 거북선을 건조했던 선소(船所)가 남아있는데, 이 선소의 형태가 선거(Dock) 내에서 함선을 건조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선소의 규모에서 만들 수 있는 함선의 크기는 대략 20m 내외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판옥선은 한 달 내에 빨리 만들 수 있는 구조인가? 동양 선박은 서양 선박과 달리 용골(Keel)과 늑골(Frame)이 없다. 선수와 선미를 길게 관통하는 15m 이상의 긴 목재(용골)가 필요치 않다. 또 판옥선은 2층 갑판선 구조의 소나무로 만든 평저선이다. 고하도 인근 도서의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밑판(본판)과 옆판(삼판)으로 기본 구조를 잡고, 여기에 횡강력 유지를 위한 가룡목과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깔아 평선의 구조를 이룬다. 이 평선 위에 방패판을 설치하고 선루를 만들어 이를 상장이라고 한다. 상장에는 양현(좌현과 우현)과 이물(선수)에 여장(성가퀴)을 설치하고, 격군과 타공이 위치하여 노를 젓고 방향타를 조종한다. 상장 위에 또 포판을 깔아 청판(廳板)’을 설치한다. 청판에는 두 개의 돛대와 누각(장대 곧 지휘소), 깃대를 설치한다. 곧 판옥선은 기본 평선 구조에 상장과 청판을 얹어 2층 갑판선의 구조로 건조한다. 전쟁이 한창인 때에 솜씨 좋은 목수들이 힘을 모아 한 달이면 능히 만들 수 있는 선체 구조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얼마나 많은 판옥선을 만들어 전력 증강을 하였을까? 무술년(1598)에 절이도해전과 왜교성전투가 있었고, 마지막 노량해전에 참가했던 병력은 대략 7천여 명에 달했다. 그렇다면 판옥선 1척당 130명의 인원(격군과 사부 등)이 타고 있다고 볼 때 노량해전에 투입된 함선은 대략 50여 척의 판옥선과 협선의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외에 대략 40여 척의 함선이 이 시기에 신속하게 대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명확한 신념과 임진년 거북선을 만들었던 나대용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나대용은 임진년 사천해전에서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모두 참전하였다고 전한다. 고로 이 시기에 나대용은 이순신의 지시로 새로운 판옥선 건조에 매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왜란이 끝난 후 나대용은 판옥선이 모두 60척이라고 조정에 보고한 바도 있다.

 

이처럼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했다. 적선과 부딪쳐 능히 당파(撞破)할 수 있었고, 해상에서의 빠른 진형 변화로 전술적 운용성이 뛰어났으며, 화포에 의한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함선이었다. 이 판옥선에서 통제사와 수사, 첨사와 만호 등이 장대에서 지휘하고, 청판에서는 군관들의 지시로 총통을 운용하는 화포장과 포수, 활을 쏘는 사부 등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 아래 상장에서는 격군장(사공)의 구령에 맞춰 격군(노꾼)들이 2인 1조가 되어 좌우로 나뉘어 힘차게 노를 저었으며, 타공이 배의 방향타(키)를 운용하였다. 맨 아래 격실에는 지휘관과 선원들의 침실과 각종 창고 등이 있었다.

 

새로운 전선을 진수한 이순신의 심정

 

바다에서의 해전은 배 자체가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진(背水陣)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도망칠 수가 없으므로 장수가 잘만 지도하면 겁쟁이 병사들도 정예 병사처럼 싸우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판옥선을 탄 장수와 병사들은 같은 운명공동체라는 강한 소속감이 생겨난다.

 

무술년 1월 2일, 새해를 시작하면서 첫 업무로 이순신은 판옥선 진수식을 행하였다. 이순신이 일기에 무심히 쓴 새로운 전선을 낙괴했다는 말은 새로운 판옥선을 진수하여 이제 조선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적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는 복수혈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며, 명량해전의 승리 후에도 뒷걸음치던 이순신이 바야흐로 새 판옥선을 물에 띄워 분탕질하는 왜적을 향해 분노의 칼을 빼어 든 것이다.

 

혹자들은 이순신을 말하기를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로 인해 목숨을 건 비장함의 상징으로 보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오히려 이길 수를 다 찾고 나서 싸운다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이라는 말이 이순신을 이해하는 최적의 항로이다.

 

비상한 전략가 이순신은 무턱대고 적과의 교전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호시탐탐 이순신의 흔적을 쫓는 왜적들 앞에서 수군 전력을 감추고 소규모 전투를 절제하여 유소불위(有所不爲)’, 곧 무턱대고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다만 한두번의 결전(決戰)을 위해 서서히 수군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무술년 1월 2일, 새로 진수한 판옥선에는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들을 향해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낼 수 없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새로운 전선을 진수한 이순신의 심정

 

바다에서의 해전은 배 자체가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진(背水陣)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도망칠 수가 없으므로 장수가 잘만 지도하면 겁쟁이 병사들도 정예 병사처럼 싸우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판옥선을 탄 장수와 병사들은 같은 운명공동체라는 강한 소속감이 생겨난다.

 

무술년 1월 2일, 새해를 시작하면서 첫 업무로 이순신은 판옥선 진수식을 행하였다. 이순신이 일기에 무심히 쓴 새로운 전선을 낙괴했다는 말은 새로운 판옥선을 진수하여 이제 조선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적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는 복수혈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며, 명량해전의 승리 후에도 뒷걸음치던 이순신이 바야흐로 새 판옥선을 물에 띄워 분탕질하는 왜적을 향해 분노의 칼을 빼어 든 것이다.

 

혹자들은 이순신을 말하기를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로 인해 목숨을 건 비장함의 상징으로 보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오히려 이길 수를 다 찾고 나서 싸운다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이라는 말이 이순신을 이해하는 최적의 항로이다.

 

비상한 전략가 이순신은 무턱대고 적과의 교전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호시탐탐 이순신의 흔적을 쫓는 왜적들 앞에서 수군 전력을 감추고 소규모 전투를 절제하여 유소불위(有所不爲)’, 곧 무턱대고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다만 한두번의 결전(決戰)을 위해 서서히 수군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무술년 1월 2일, 새로 진수한 판옥선에는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들을 향해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낼 수 없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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