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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31호] 세종식 문제해결 회의법 - 토론을 넘어 문제해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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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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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숙론(熟論)』(2024)에 나오는 구절이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의 이념·지역·계층·빈부·남녀·세대·환경·다문화 갈등을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지적하면서, “우리 사회 극심한 갈등의 배후에 교육 붕괴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분석한다(69쪽). 교육 현장이 공존을 위한 협력과 배려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신분 상승을 위한 경쟁의 각축장이 된 결과,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갈등이 얽히고설킨 복마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책에는 그 해법을 위한 인상적인 사례들도 소개된다. 암기보다 질문을 중시하는 하버드대의 토론수업, 누런 종이봉투에 샌드위치를 담아 와 발제를 듣고 자유롭게 토론을 이어가는 ‘브라운 백 런치 미팅’, 그리고 1991년 넬슨 만델라 석방 이후 극심한 흑백 갈등 속에서 남아공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차세대 지도자 22인이 케이프타운 몽플뢰르에 모여 장기간 워크숍을 진행하며 발전시킨 ‘시나리오 사고 방법론’ 등이 그것이다.

숙론의 오래된 미래, 세종의 경연

특히 숙론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구체적 기법들이 눈길을 끈다. 예컨대 학술회의의 모든 발제를 오전에 마치고, 점심 이후에는 네 시간 가까이 끊임없는 숙론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최 교수는 “붙박이 의자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의자를 선호한다”며, 의자를 동심원 형태로 배열해 안쪽에는 핵심 발제자와 토론자를, 중간에는 전문가를, 바깥에는 학생과 일반 참여자를 배치한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서너 시간 대화를 이어가면 대부분의 참여자가 자연스럽게 발언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110~111쪽).

그밖에도 현장에서 곧바로 활용할 만한 조언들이 적지 않다. 숙론이 침체될 조짐을 보이면 진행자가 ‘선의의 악마(devil’s advocate)’ 역할을 맡아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점, 아이디어는 공격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토론이 막히면 작은 모둠으로 나누라는 조언 등이 그것이다. “너댓 명 단위의 작은 모둠으로 나눠 10~30분만 따로 논의한 뒤 다시 모이면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살아난다”(194쪽)는 말은 특히 인상 깊다.

나는 최재천 교수의 문제의식과 방향성에 깊이 공감한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한 에세이 형식이다 보니, 조직 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해결 시스템’ 차원의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역사 속 숙론과 회의 문화의 전통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점은 아쉽다. 사실 한국사는 ‘회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의 제가(諸加)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는 모두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던 숙론의 장치였다. 특히 신라 화백회의는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부결한다”는 만장일치 원칙으로 유명하다. 『신당서』는 이를 “여럿이 모여 상세히 의논해 결정한다"고 기록했고, 『삼국유사』 또한 “대신들이 반드시 함께 모여 의논하면 그 일이 이루어졌다[其事必成 기사필성]”고 전한다. 인상적인 점은 신라인들이 결정짓는 것보다는 충분히 논의하는 과정을 더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회의를 단순한 다수결의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은 ‘회의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회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 그 중심에는 세미나식 어전회의인 경연(經筵)이 있었다. 최재천 교수 역시 경연을 “조선의 군왕이 신하들과 함께한 공부 모임”이라고 소개하며,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벌여야 했던 조선의 왕들은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숙론』에서 제시한 현대의 숙론 기법들이 이미 세종시대에 훨씬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구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질문과 토론 중심으로 진행된 경연은 하버드식 토론수업을 떠올리게 하고, 집현전 학사들의 장기 합숙 토론은 ‘브라운 백 런치 미팅’을 연상시킨다. 또한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며 미래 시나리오를 따져보는 정책 논의 방식 역시 세종시대 국정 운영의 일상이었다.

문제해결 회의로서의 경연

경연의 핵심은 이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것”이었다. 세종은 바로 그 숙론의 본질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군주였다. 그는 신하가 절실하지 않은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면 적절히 말을 끊어, 논의가 바다로 흘러가듯 산만해지지 않도록 했다. 반대로 침묵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 앞에서는 ‘다사리’라 하여, 모두가 반드시 한 마디씩은 발언하도록 이끌었다. 세종에게 회의란 형식적인 보고의 자리가 아니었다.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특정인이 말을 독점하는 분위기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짚고 원인을 분석하며 대안을 검증하는 문제해결 회의가 불가능하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지만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경연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는 혁신이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행 중인 제도를 더욱 분명하게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申明 已立之法 신명 이립지법](세종실록 25년 10월 16일). 세종 이후 경연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창의적 숙론의 장으로 변모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의견을 듣되 최종 결정은 왕이 책임진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토론의 활력과 결정의 책임성을 함께 살리려 한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도 않았다. 세종 때 새롭게 마련된 회의 규칙 가운데 하나는 경연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함께 강독하게 하는 것[合爲一番 進講 합위일번 진강]이었고, 또 하나는 경연이 끝난 뒤에도 다시 경연청에 모여 종일토록 토론하게 하는 것[退于經筵廳 終日討論 퇴우경연청 종일토론]이었다. 이는 세종의 왕자 시절 스승이었던 탁신(卓愼)의 제안이었는데, 세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아가 토론에 참여한 신하들이 식사를 위해 자리를 뜨느라 몰입이 끊기지 않도록 “점심밥을 지급하라[給晝飯 급주반]”고 명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숙론이 중간에 흐트러지지 않도록 제도와 환경까지 세심하게 설계한 것이다.

세종은 활발한 숙론을 위한 회의 분위기 조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하들이 왕 앞이라고 해서 머리를 숙이거나 엎드리지 말고, 곧은 자세로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세종실록 5년 7월 3일). 공손한 침묵보다 진실한 발언을 더 중시한 것이다. 토론이 위축될 때면 그는 “서로 논박하며[互相論駁 호상논박], 각자 마음속에 쌓인 바를 다 말하라[各陳所蘊 각진소온]”고 독려했다. 긴급한 현안이 생기면 관련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아[會于一處 회우일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거리낌 없이 논의하게 했다(세종실록 3년 8월 5일). 반대 의견도 끝까지 경청했고, 논의가 부족하다 싶으면 하루 종일 토론을 이어가게 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인물을 일부러 회의에 참여시키는 것도 세종 숙론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허조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 불린 허조는 여러 정책 제안이 나오면 반드시 그 이면의 위험과 최악의 상황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라고 불평하면서도(세종실록 15년 10월 23일), 끝까지 그의 의견을 경청했고 문제점을 보완한 뒤에야 정책을 시행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조직 내부에 ‘예방 백신’을 둔 셈이었다.

경연, 세종시대의 아이디어 플랫폼

경연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쉽게도 《세종실록》에는 토론의 핵심 내용만 간략히 기록되어 있을 뿐, 회의 진행 방식까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다행히 16세기 지식인 유희춘이 남긴 《미암일기》에는 실제 경연의 절차와 분위기가 비교적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연은 날이 밝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참석자는 왕과 대비, 재상과 언관, 승지 등이었고, 교재는 주로 《대학》 같은 유교 경전이었다. 진행 순서는 입장 → 왕의 낭독 → 언관의 시독(侍讀) → 왕의 풀이 → 검토관들의 논의 → 신료들의 정책 제안 → 대비의 응답 순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고전 속 한 구절을 읽은 뒤 그것을 현실 정치와 연결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대학》의 내용을 바탕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군주의 자세를 논한 뒤, 곧바로 ‘을사사화’ 관련 인물들의 신원을 논의하는 식이었다. 고전의 ‘말’에서 출발해 당면한 ‘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세종실록》에도 그러한 경연의 특징이 곳곳에 드러난다. 즉위 직후 첫 경연의 교재는 《대학연의》였다. 세종은 이를 읽다가 곧바로 과거제도의 문제를 꺼냈다.

“과거를 설치해 선비를 뽑는 것은 참다운 인재를 얻기 위함인데, 어떻게 하면 선비들로 하여금 들뜨고 화려한 것만 쫓는 풍조를 버리게 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즉위년 10월 7일)

시험이 본래 취지를 잃고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이에 변계량은 암기식 시험 대신 논술형 대책(對策)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경연이 곧 인재 선발과 국가 운영을 함께 논의하는 정책 회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런 방식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재위 11년, 세종은 《좌전》을 강독하다가 성균관 교육과 인재 선발 문제를 꺼냈다. “성균관에서 경서를 강하게 하여 인재를 뽑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황보인은 논술 중심의 시험이 더 바람직하다고 답했다(세종실록 11년 6월 2일). 세종은 늘 고전 읽기를 현실 문제 해결과 연결했다. ‘말’과 ‘일’을 함께 엮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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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연은 세종 정부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첫째, 관료 사회에 독서와 학습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세종은 즉위 두 달도 되지 않아 경연을 열고 《대학연의》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을 세 차례나 반복해서 강독하게 했고, 그 결과 조정과 유생 사회에 ‘대학연의 읽기 붐’이 일어났다. 단순한 독서 장려가 아니었다. 함께 읽고 토론하며 생각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과정이었다.

둘째, 고전과 역사를 통해 현실 정책의 시행착오를 점검하게 했다. 세종은 《자치통감속편》을 읽다가 왕안석의 신법 실패 사례에 이르러 “처음부터 법을 너무 엄하게 시행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세종실록 12년 12월 18일). 이후 세종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마다 점진적 방식을 선호한 배경에는 이런 학습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강행실도》 편찬, 고려사 개편, 사가독서 제도 역시 모두 경연 토론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경연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발굴되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위 10년, 경상도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은 크게 괴로워하며 그 대책을 물었다. 이에 경연관 변계량은 《효행록》의 사례를 들며, 역사 속 효행 이야기를 모아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읽고 외우게 하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바로 《삼강행실도》 편찬으로 이어졌다(세종실록 10년 10월 3일). 고려사를 다시 편찬할 때, 내용이 충실하면서도 체제가 뛰어난 기전체(紀傳體) 방식을 채택하자는 의견이 나온 곳도 경연이었다(세종실록 20년 3월 21일). 젊은 학자들에게 일정 기간 독서에만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 제도 역시 경연 논의 속에서 비롯되었다(세종실록 10년 3월 28일).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길어 올리는 국가적 아이디어 플랫폼이 곧 경연이었던 셈이다.

셋째, 무엇보다 경연은 신하들의 마음을 여는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왕 앞에서 현실 정치나 임금의 잘못을 말하기를 꺼리던 신하들도, 세종이 진심으로 직언을 요청하고 용기 있는 발언을 칭찬하자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세종실록 7년 1월 22일; 12년 5월 21일). 재위 7년, 세종이 《태조실록》을 직접 보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불가합니다. 사고(史庫)에 넣으십시오”라고 직언하여 왕이 그전 시대의 실록을 볼 수 없게 한 일(세종실록 7년 12월 5일)은 그 상징적 사례다.

임금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장애물로서 여자와 환관과 아첨에 관한 이야기(세종실록 12년 11월 21일; 19년 11월 12일)나, 국왕이 처음엔 부지런히 노력하다가도 끝에는 흐지부지되고 마는 일이 많다면서 한 무제의 실패를 경계로 삼은 일(세종실록 12년 11월 25일) 등도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왔다.

오늘날 직장회의에서 쓸 수 있는 세종식 경연의 팁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 회의는 일로 시작해 일 이야기만 하다 끝난다. 반대로 대학 강의실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오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종의 경연은 ‘말’과 ‘일’을 함께 묶었다. 고전을 통해 사람의 마음과 원칙을 다지고, 그것을 다시 현실 정책과 연결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대학원 수업이나 공무원·기업 교육에서 이러한 ‘세종식 회의’를 응용해왔다.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놀랍다”고 말한다.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먼저 참석자의 역할을 구분한다. ‘세종대왕’ 역할은 오늘 무엇을 결정할지 의제를 정하고 회의를 이끈다. ‘시독관’ 역할은 자유롭게 문제점과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 단계에서는 비판보다 ‘아이디어 꼬리 잇기’를 장려한다. 반면 ‘검토관’ 역할은 허조처럼 잠재적 위험과 허점을 집요하게 점검한다. 마지막으로 ‘시강관’ 역할은 논의를 정리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역할놀이를 하는 데 있지 않다. 함께 읽은 자료에 몰입하고, 서로의 생각을 끝까지 듣는 경험 자체에 있다. 특히 세종시대 인물들의 생생한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곁들이면 참여자들의 몰입도는 훨씬 높아진다.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조직은 갈라지지만,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조직은 성장한다. 세종의 경연은 바로 그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그 ‘오래된 숙론의 미래’가 바로 세종의 경연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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