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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5호] 세종은 어떻게 인재를 춤추게 했나: 집현전 조직문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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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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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 인재들에게 집현전은 어떤 곳이었을까. 과연 집현전은 학사들이 출근하고 싶은 직장이었을까.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근무지가 경복궁이어서 지방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다른 관료들은 내·외관 순환근무제에 따라 일정 기간 지방에 나가 근무해야 했다. 만 5년씩 지방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야 했는데, 다들 지방 내려가기를 꺼렸다[多慕京官 不樂外任 다모경관 불락외임](세종실록 13년 10월 17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성, 그것도 화려한 궁궐로 출퇴근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인재를 몰입시킨 집현전의 공간 설계

근무지가 궁궐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녔다. 곧 핵심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많다는 뜻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수시로 국왕을 비롯해 국가 핵심 요직의 인사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집현전은 주요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사정전 바로 옆에 자리했고, <그림>에서 보듯이, 심지어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보다도 왕과 더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왕의 언행과 나랏일의 흐름, 주요 인사 이동 등을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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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정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내고, 집현전 출신들이 요직에 배치되면서 집현전은 정치의 중심에 놓이는 일이 많았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보듯이 세종 사후 학사들이 정치적 파동에 휘말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이를 철저히 정치와 분리시켰다. 학사들이 연구하고 토론하던 주합루를 인정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창덕궁 후원에 배치한 것이 그 예다.

경복궁 안 집현전의 위치를 보면 세종의 공간 설계 의도, 곧 일종의 오피스 코드(Office Code)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경복궁 내 주요 기관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창의적 몰입과 신속한 정책 실행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집현전을 집무실인 사정전 바로 옆에 둔 점, 그 서쪽에 왕과 학사들의 전용 도서관인 장서궐을 둔 점, 바로 뒤에 경치가 뛰어난 누각인 경회루를 배치한 점이 그렇다.

사정전이나 경회루에서 세미나식 어전회의인 경연이 자주 열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일대는 연구와 토론, 자료 탐색, 왕과의 소통이 모두 가능한 공간 구조였다. 한마디로 경복궁 서편은 인재들이 일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단순히 효율을 위한 배치가 아니라, 인재들이 신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물론 왕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보니 학사들은 일종의 ‘상시 대기’ 분위기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월화수목금금금’에 야간 근무가 당연한 셈이었다. 업무 강도 또한 상당히 높았다. 실제로 과로로 순직한 집현전 학사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남수문이다. 세종은 과로로 목숨을 잃은 그를 매우 애석하게 여기며, 순직한 집현전 학사들에게 국가 차원의 특별한 보상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25년 4월 29일).


높은 강도와 높은 자율이 공존한 집현전

집현전이 학사들에게 ‘출근하고 싶은 직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출퇴근 문화에 있다. 학사들은 다른 관리들과 달리 출퇴근 시간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한때 사헌부 관리들이 집현전 학사들의 출퇴근 시간을 규찰하겠다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은 대궐 안에 있으니 따로 규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그 제안을 물리쳤다(세종실록 12년 5월 21일). 집현전 학사들은 “늘 새벽에 출근하는 관원들[常時早仕之官 상시조사지관]”이자 왕과 수시로 대면하는 사람들이니, 일반 관원처럼 사헌부가 관리할 차원이 아니라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집현전을 선망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신 중에서 재행과 문학이 있는 젊은 사람[年少者 연소자]”이라는 선발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학사 전원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뒤 1년 이내에 선발되어, 최소 10년 이상 장기 근무했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에는 명문가 출신도 있었고 미천한 집안 출신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가문이든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은 오직 하나, 실력이었다. 남수문, 정인지, 유효통, 유상지, 김순, 유의손, 박서생, 김예몽, 김말 등 다수의 학사들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심지어 김문은 “학문이 박학(博學)하면서도 정심(精深)하여 묻는 것마다 즉시 대답해 모두 들어맞아 당세를 탄복시켰던” 수재였지만, 어머니가 무당 출신이었다(세종실록 30년 3월 13일). 집현전은 가문이 아니라 실력으로 발탁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집현전이 선망의 직장이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구성원 상호 간의 존중과 우정이다. 젊은 지식인들은 십여 년 동안 함께 생활하고 토론하며 뜻과 문제의식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중했다. 학사들끼리 주고받은 시문에 “고절(孤節)”과 “지음(知音)”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들이 얼마나 깊이 교유하면서 서로를 아꼈는지를 보여준다. 신숙주가 일본 사행 중 후쿠오카 하카타에서 지은 시에도 그러한 우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신숙주, 《보한재집》 4권).

 하늘 끝에 노닌 지 반년이라
 … 산속 등불 아래 글 읽던 오래된 벗들이
 한담을 나누다 문득 바다 밖 숙주를 애처로워하겠지

그는 옛날 진관사에서 함께 독서하던 학사들을 ‘오래된 벗[舊友 구우]’이라 부르며 깊이 그리워했다.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뜻을 함께 나눈 지음(知音)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집현전 학사들에게 직장은 단순히 관직을 수행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서로의 말과 생각이 막힘없이 통하고,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곧 대화가 살아 있는 지적 공동체였다.

그러면 세종은 어떻게 집현전을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첫째, 학습과 토론문화의 조성이다. 집현전 학사들을 움직인 힘은 단지 좋은 근무 환경이나 뛰어난 동료에만 있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끊임없이 탐구력을 키우고, 배운 지식을 실제 국정에 연결하도록 이끈 세종의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1426년 12월, 세종은 집현전 부교리 권채 등을 불러 “너희를 집현관에 둔 것은 젊고 장래가 있어 글을 읽혀 실제 효과[實效 실효]를 거두게 하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직무 때문에 독서에 몰입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보고,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在家 專心讀書 재가 전심독서] 성과를 나타내라”고 지시했다. 이른바 ‘사가독서제’의 시작이다(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이후에는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북한산 자락 진관사에서 몰입 독서를 하게 하는 ‘상사독서제’로 발전시켰다. 오늘날로 치면 업무에서 잠시 떼어내 깊이 연구하게 하는 안식년 제도와 다르지 않다.

배움과 토론이 제도가 되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집현전의 젊은 신하들이 내놓는 좋은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데 매우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연에 사용한 책을 표기(標記)해서, 즉 ‘경연(經筵)’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책마다 찍게 하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책에 대해서는 ‘내사(內賜)’라는 도장을 찍어서 주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세종은 “그렇게 하라”라고 했다(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가 폐지된 수문전과 보문각을 다시 복구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에게 기대(期待)하는 길이 넓어지게” 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허락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제안을 하면서 정인지가 한 말이다. 그는 문예(文藝)란 “정신의 운용과 심술의 움직임[精神之運 心術之動 정신지운 심술지동]”에서 비롯되므로 일정한 기한을 정해 국가사업처럼 추진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다(세종실록 11년 4월 27일). 인문학과 창의적 사고는 단기간의 실적 압박 속에서 나오지 않으며, 평소 배우고 익히는 문화 속에서 비로소 꽃핀다는 뜻이다.

둘째, 집현전의 구성과 재임 기간이다. 우선 100여 명의 학사 가운데 상당수가 자연과학 계열의 전문성을 지닌 인재들이었다. 장영실의 매형 김담은 천문학자로 《칠정산 외편》 편찬에 참여했고, 김빈 역시 문과 출신이지만 ‘갑인자’를 주조하고, 간의대를 관리했으며 자격루 제작에 참여한 자연 과학자였다. 그 외에도 유효통과 이예는 생물학자 내지 약학자로 각각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편찬하였다. 정인지만 하더라도 문과에 장원 급제 했지만 수학, 과학에도 밝은 인재였다. 이들은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대하여 자문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장기간 자기 전문 분야의 연구에 몰두했다. 전공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밥 먹고 때론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는 사이에 긴밀한 토론과 자연스러운 교제가 이루어졌으며, 이 속에서 이뤄진 대화가 서로의 연구에 큰 자극이 되고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융합형 인재와 장기 몰입의 구조

집현전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었다. '살고 살리는 기쁨(생생지락)'이라는 세종의 비전에 공감하고, 서로를 '지음(知音)'으로 예우하며, 자신의 일을 역사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몰입의 공동체였다. 사람을 몰입시키는 것은 연봉이나 복지의 수준만이 아니다. 일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공동의 성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줄 때 인재는 비로소 스스로 몰입한다. 600년 전 집현전이 보여준 조직문화의 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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