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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0호] AI 시대의 글쓰기, 정인지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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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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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글쓰기, 정인지에게 묻다

 

“정인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문 수련을 이어가 마침내 모두가 감탄할 경지의 문장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요즘처럼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시대에도 그런 수련이 여전히 필요할까요?”

 
지난 칼럼을 읽은 한 지인이 던진 질문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정인지가 몸을 다스리는 훈련에서 시작해 고전을 익히고 암송하며, 마침내 수준 높은 글쓰기로 나아가는 수련 과정을 거쳤음을 살펴보았다. 그 지인은 그 글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달라진 만큼 학습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찔했다. 한 번도 정면으로 마주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늘 그렇듯 더 근본적인 사유로 나아가게 만든다. 글쓰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결국 그 물음은 다시 정인지라는 인물을 들여다보게 했다. 세종이 “오직 정인지만이 함께 논할 수 있다[唯麟趾可與論此]”며 일을 맡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성종실록 9년 11월 26일, 정인지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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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는 무엇보다 세종과 비슷한 또래였다. 표에서 보듯 황희와 허조는 세종보다 30세 안팎 연상의 원로 대신이었고, 신숙주·성삼문 등은 20세가량 어린 젊은 신진, 이른바 ‘세종 키즈’였다. 세종을 중심에 놓고 보면, 한 살 차이 또래 신하 정인지가 주었을 친근함과 동료 의식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말하자면 세종에게 정인지는 ‘친구 같은 신하’였다.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하면서도(친구의 역할), 일이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인물이었다(신하의 역할). 실제로 공법 시행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그는 실행 방안을 제시해 개혁을 현실로 만들었고, 백성이 편리하게 여기는 결과를 끌어냈다.

‘세종의 친구 같은 신하’ 정인지

1450년 윤1월, 명나라 사신 예겸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도 그의 보필은 빛을 발했다. 5개월 전에 발생한 ‘토목의 변’ 이후 명과 조선 사이에는 군사 파병과 말 공급 문제로 긴장이 높아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견된 예겸은 한림원 시강을 지낸 고급 문신이었다. 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세자가 사신을 맞이했고, 대화 상대로 정인지·박팽년·신숙주 등을 선발했다. 예겸이 시를 건네자 정인지가 즉시 화답했고, 두 사람은 날마다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예겸은 “그대들과의 하룻밤 대화가 십 년 독서보다 낫다[與君一夜話 勝讀十年書]”고 감탄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8일). 이후 사신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압박과 요구는 사라지고, 문화와 학문을 주제로 한 교류가 중심이 되었다. 지식과 교양이 외교의 긴장을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정인지는 왕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인물은 아니었다. 세제 개혁과 훈민정음 창제에는 적극 협력했지만, 세종의 호불적(好佛的) 태도에는 분명히 반대했다. 흥천사 경찬회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제사의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며 불교 의례를 비판했다. 그가 술기운을 빌려 세조에게 거친 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석보상절》과 같은 불서를 간행하는 일은 조선 왕조의 이념인 유교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했기에, 원로 대신으로서 왕 앞에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권력에 기대지 않고, 원칙을 굽히지 않았던 신하였다.

정인지 글쓰기의 힘①: ‘원리’로 시작해서 ‘현실의 결핍’으로 들어간다

이런 점에서 글의 서두에서 제기된 지인의 질문, 곧 ‘AI 시대의 글쓰기와 공부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AI가 문장을 만들어 주는 시대라 해도 글쓰기 수련이 필요한 이유는, 글쓰기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생각을 다루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인지는 문장을 꾸미는 문장가가 아니었다. “시 삼백을 외워도 외교 현장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말처럼, 그는 글로 현실을 움직이고 외교적 난관을 돌파한 사람이었다.
 
그의 글쓰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텍스트가 바로 《훈민정음》 서문이다. 그의 글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정인지의 글은 언제나 큰 원리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른바 메타적 접근을 통해 독자가 개별 소재, 곧 ‘문자’라는 도구에 매몰되지 않도록 먼저 시야를 열어 준다. 예컨대 《훈민정음》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문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을 통하게 하고 삼재(천지인)의 도리를 문자에 실어 후세 사람들이 함부로 바꿀 수 없게 하였다.” 그가 쓴 《아악보(雅樂譜)》 서문에서도 비슷한 접근이 나타난다. “음악은 성인이 성정을 기르고, 신과 사람을 화하게 하며, 하늘과 땅을 자연스럽게 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문자를 인간 사회의 기술이 아니라 우주 질서의 표현으로 보았고, 후자의 경우 음악을 곧 우주 질서 그 자체로 파악했다.
 
둘째, 정인지의 글은 현실의 결핍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그는 큰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곧 당대가 직면한 문제로 시선을 끌어내려, 독자―곧 왕과 신민―로 하여금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게 만든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그는 중국 문자를 빌려 써 온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다.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 깊은 뜻)를 이해하기 어려워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이 통하지 않아 괴로워한다.” 문자가 단순한 학습 도구를 넘어 배움의 궁극 목적에 이르게 하는 매체이자, 공정한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국정 운영의 토대임을 보여 준 것이다.
 
《아악보》 서문도 같은 구조를 보인다. 음악이 본래 성정을 기르고 신과 사람을 화하게 하는 것임에도, 현실에서는 국가에 보관된 악기가 충분하지 않았고 악장의 출처조차 불분명했으며, 악공들이 임의로 덧붙인 부분까지 있어 신빙하기 어려운 상태였음을 지적한다. 그가 쓴 또다른 글, 《치평요람》을 올리는 전(箋)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에는 본받고 경계할 사례가 넘치지만, 날마다 수많은 정사를 처리해야 하는 국왕에게는 서적이 지나치게 많아 오히려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식의 과잉이 낳는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정인지가 이러한 결핍을 결코 해결 불가능한 난제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문제를 진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설계와 정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정인지 글쓰기의 힘②: 압도적인 실증성으로 설득하고,

역사적 의미 부여해 추진력을 높인다

셋째, 정인지는 왕의 의지를 ‘역사적 기점’으로 배치하면서도, 그 결정이 학문적 검토 위에 세워졌음을 강조한다. 군주의 결단에서 시작된 그 일이 충분한 학습과 논의를 거친 결과임을 보여 주어 실행의 정당성과 힘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훈민정음》 서문의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라는 구절, 《아악보》 서문의 “주상 전하께옵서 특별히 생각을 기울이시어 경술년(1430년) 가을 경연에서 《율려신서》를 공부하시면서”라는 대목, 그리고 《치평요람》 전문의 “주상 전하께서 역사를 토론하시어 여러 사책을 두루 보기 어려우니 한 책으로 뽑아 모으라 분부하셨다”는 서술은 모두 세종의 의지로 그 일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작업이 철저히 유교적 지식 체계 위에 세워졌으며,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임을 강조했다. 《주역》의 용어를 빌어서 훈민정음이 우주 원리에 근거한 문자임을 규명했다. 동시에, 그는 정음이 누구나 쉽게 배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문자임을 논증했다. 곧 글자는 형상과 소리를 두루 반영하여 간결하면서도 정밀하게 구성되었기에, 지혜로운 이는 짧은 시간 안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익힐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뜻을 정확히 전달하고 “송사에서도 실정을 밝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악보》 서문에서도 그는 압도적인 실증성을 통해 아악 정비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악기의 출처를 제시하고, 음률의 길이 문제와, 청성·반율·손익 계산, 악보 간 비교 과정을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검토와 판단의 근거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 의례 음악을 하나의 기준으로 표준화할 수 있다는 신뢰를 형성했다.
 
넷째, 정인지의 글은 그 일의 역사적 의미를 선언하며 마무리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를 한 개인의 재능이나 우연한 발명으로 보지 않고, 보편적 이치가 시대를 만나 드러난 역사적 사건으로 강조했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되었으나, 만물의 뜻을 깨달아 큰 지혜를 이루는 일은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웅변적 표현을 통해, 훈민정음이 개물성무(開物成務)의 차원에 이르는 큰 업적임을 역설한 것이다.
 
《아악보》에서도 이러한 관점은 이어진다. 그는 주자(朱子)의 시대에도 완결되지 못했던 영역이 우리 왕조에 이르러 비로소 구현되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주자의 뜻이 천 년 뒤에 이르러 조금이나마 펴지게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우리 왕조를 기다려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세종이 자주 말하던 “우리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朝鮮無前之事]”이라는 수사와 맥을 같이한다. 곧 구성원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을 부여함으로써, 일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전략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큰 인재들이 오래 역할하는 사회 만들려면

정인지는 자신을 ‘공자 문하의 자유(子遊)나 자하(子夏) 정도의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서거정, 《필원잡기》). 실제로 그는 글을 현실의 문제 해결로 연결한 실천형 지식인이었다. 병조판서 시절의 일화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한 아전이 수년치 문서를 처리하지 못해 곤란해하자, 정인지는 문서를 유형별로 정리해 나누고 각 도의 감사와 수령에게 분담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몇 마디 말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중요 업무들이 하루아침에 정리되었다[不過數語 而積年機務 一朝掃盡]”(강희맹, 《사숙재집》). 이 에피소드는, 지식이 현장을 만나 어떻게 힘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기업에서 말하는 시스템 기반의 일하기, 즉 일의 본질을 먼저 꿰뚫고, 구조를 세운 뒤, 역할을 나누어 실행하게 하는 방식이 이미 그에게서 구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특별했던 까닭은 단지 문장을 잘 짓는 데 있지 않았다. 왕 앞에서는 필요할 때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동시에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책임 있게 대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세조 역시 그를 벌했다가 다시 불러 쓸 수밖에 없었고, 당대 사람들은 그를 가리키며 “재상은 역시 글 읽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평했다(《필원잡기》). 여기서 말하는 ‘글 읽은 사람’이란 단순한 학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배움을 통해 판단하고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각해 보면, 조직이 오래 가는 힘은 한 번의 성과가 아니라 인재가 축적되는 구조에서 나온다. 큰 인재들이 오래 역할을 이어 갈 수 있는 사회, 지식과 경험이 단절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조직이야말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정인지가 태종부터 성종까지 '7대 임금을 섬겼다'는 사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것은 성공한 시대의 말과 글이다. 그 속에는 단지 고전적 문장이나 수사가 아니라, 현실을 진단하고 실행으로 옮기며 공동체를 움직였던 사고의 방식이 담겨 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말과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사람을 설득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더 나은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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