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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9호] 정인지는 왜 세종의 질문을 기다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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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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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는 왜 세종의 질문을 기다렸나?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렸다. 임금이 말하였다. “산수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聖人: 주공)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알고자 한다.”

- 세종실록 12년 10월 23일


‘세종실록 속 10대 명장면’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1418년 8월, 스물 두 살의 세종이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말을 먼저 듣고 그에 맞는 법과 제도를 세우겠다’고 한 취임사가 아마도 첫 장면이 될 것이다. 1426년 2월의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강원도 횡성에서 강무 중이던 국왕을 대신해, 소헌왕후가 도성의 대화재를 수습했다.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민가 2,000 여호가 불타는 가운데, 만삭의 몸으로 왕비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며 화마를 진압했다. 1444년 2월의 장면 또한 그러하다. 창제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훈민정음을 둘러싸고, 최만리 등 반대 신하들을 불러 끝장토론을 벌이던 순간이다.

정인지, 세종의 질문을 기다리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내가 가장 아끼는 장면은 따로 있다. 바로 앞에 인용한 실록 기사에 묘사된 모습이다. 세종 재위 12년, 1430년 10월 23일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가 임금 곁에 서서 왕의 물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이유는, 세종이 《계몽산(啓蒙算)》이라는 수학서를 배우고 있었고, 왕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계몽산》은 어떤 책이었을까. 세종은 왜 그처럼 난해한 수학을 굳이 배우려 했을까. 그리고 정인지는 누구였으며, 그는 왜 임금 앞에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숱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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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계몽산》이라는 수학책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가리킨다. 원나라의 수학자 주세걸이 1299년에 지은 입문서로, 곱셈과 나눗셈을 비롯해 무게의 단위 환산, 도량형의 표시, 농토의 측량 단위, 원주율과 분수 계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름은 ‘수학 입문서’이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한 수준의 수학서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수학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을까. 첫째 이유는 그가 과학기구의 제작과 농업기술의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러한 일들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장주, 《우리 역사 속 수학이야기》, 사람의 무늬, 2012). 실제로 세종은 수학을 국가 운영의 핵심 분야로 인식했다. 그는 수학이 “국가의 긴요한 사무[國家要務]”를 처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며, 신하들에게 “수학을 미리 익히게 할 방책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25년 11월 17일). 수학을 모른 채로는 역법을 바로잡는 일[曆法 校正]과 같은 고도의 계산을 감당할 수 없고, 병력을 동원하거나 토지를 측량하는 일[起兵量地] 또한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13년 3월 2일).
 
다른 한편으로, 이 무렵, 곧 세종 재위 12년째인 1430년은 국가 차원에서 수학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제인 공법(貢法)의 타당성을 둘러싸고 여론조사가 진행 중이었고(12년 7월), 첨단 농업서인 《농사직설》을 간행해 전국에 배포하던 때이기도 했다(12년 2월). 또한 아악 정비 사업 역시 막바지에 이르러, 그해 윤12월에는 아악보가 완성되었다. 기준음인 황종음을 내는 황종율관을 제작하려면,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과 같은 정교한 수학 계산이 필수였다. 이 모든 국정 과제는 고급 수학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수학은 더 이상 학문적 취미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 운영을 떠받치는 실질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추천하고, 세종이 믿고 쓴 최고인재

그렇다면 왜 정인지는 세종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세종보다 한 살 위인 정인지는 태종 14년(1414), 열아홉의 나이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다. 이때부터 그는 태종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태종은 그를 향해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고 말할 만큼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성종실록 9년 11월 26일). 그 뒤로도 태종은 세종에게 정인지를 거듭 언급하며, “크게 등용할 만하다”고 추천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국왕의 물음을 맡길 만한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국가적 난제에 부딪칠 때마다 정인지의 도움을 구했다. 공법을 제정하며 세금을 어떻게 해야 공평하고 정확하게 부과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도 그랬고, 훈민정음 창제처럼 중대하지만 거센 반대가 예상되는 국책 사업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까다로운 명나라 사신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역시, 세종은 정인지를 불러 의견을 들었다. 정인지는 그때마다 창의적이면서도 헌신적으로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임금의 질문 앞에서 그는 언제나 해법을 만들어내는 신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종시대의 ‘역법(曆法) 프로젝트’다.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질서를 밝히고, 이를 통해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며 달력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세종 2년인 1420년에 시작했다. 이때 첫 책임자는 정흠지였다. 그러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세종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정초를 투입했다. 여전히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할 사역원 관원들에게 산법을 익히게 하는 한편, 집현전 교리 김빈까지 참여시켰다. 그럼에도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역법 개정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세종은 마침내 세종 13년인 1431년에 정인지를 이 프로젝트에 합류시켰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듬해인 1432년 10월, 세종은 역법이 크게 정밀해졌다며 “매우 기쁘다[予甚喜之]”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다시 힘을 더해 책을 이루어, 후세로 하여금 오늘날 조선이 전에 없던 일을 세웠음을 알게 하자[使後世 知今日建立 朝鮮無前之事]”고 제안했다(세종실록 14년 10월 30일). 정인지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국가적 숙제를 마침내 해결해낸 것이다(한영호, 「조선의 역법《칠정산 내편》해제」, 2016).

몸·말·글로 완성된 공부

렇다면 정인지는 어떻게 이처럼 뛰어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의 전기[行狀]을 보면, 정인지는 열 세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섯 해 동안 학업에 몰두했다. 먼저 그는 유교 경전을 완전히 체득했다. 누가 물어도 명료하고 세밀하게 응답할 수 있었고[應對明審], 강학에 나서면 논리가 분명하고 막힘이 없었다[論說通暢].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焚膏繼晷 志無少懈], 문장을 짓는 역량 또한 크게 진전시켰다[文詞大進]. 그 결과, 열아홉 살이던 태종 14년(1414)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당시 과거시험에서 최종 두 편의 답안이 올려졌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태종이 “주저 없이 그 하나를 집어 든 게[信手執其一]”, 바로 정인지의 답안이었다(태종실록 14년 3월 11일).

 
이 대목을 보면, 정인지의 공부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단계는 ‘말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그는 경사(經史) 공부의 전통에 따라, 앞선 시대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어떤 말을 했고, 그 말이 실제 정치의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함께 배웠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언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익힌 것이다. 그 결과 정인지는 경전을 강학할 때[講], 질문에 대해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전거를 들어 답할 수 있었고[明審],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에도 막힘없이 조리 정연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 수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말을 잘하는 능력이 지도자에게 필수적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글로 남겨 시공을 넘어 전달하는 능력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정인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쓰는 노력을 이어갔고[焚膏繼晷], 마침내 모두가 감탄할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의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정인지는 열세 살 이전에 이미 ‘자기 몸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 정흥인은 정도전의 제자로,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자 집 근처 소격서―오늘날의 서울 삼청동 일대―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한다. “나는 비록 실패했으나, 집안을 일으킬 자식을 달라”는 그의 기도 끝에 얻은 아들이 바로 정인지였다.
 
정흥인은 이 아이가 별자리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다고 여겨, ‘기린 발자국[麟趾]’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해동잡록》 권6). 그리고 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삶의 규범을 익히게 했다. 정인지는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고 주변을 정돈하는 일에서부터, 사람들과 어떻게 말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까지를 배우며 자랐다. 몸이 생각을 끌고 가지 않도록, “옳은 말과 훌륭한 의론을 날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주는 교육을 먼저 받은 것이다(정순우, 《공부의 발견》, 2007).
 
이를 종합해 보면, 정인지의 공부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는 몸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둘째는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셋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이 과정을 차례로 거친 뒤에 비로소 그는 관직에 나아갔다.
 
세종이 종종 “이 문제는 오직 정인지만이 함께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를 신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인지는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성종실록 9년 11월 26일). 말하자면 세종에게 정인지는 ‘친구 같은 신하’였다. 언제든 마음을 열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친구이자, 나라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기 일처럼 헌신하는 최고 인재였던 것이다.

세종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뒤

그렇다면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정인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임금이자 친구’였던 세종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이후의 정인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세종이 훙서한 지 8년 뒤인 1458년 2월 12일, 경복궁 사정전에서의 일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지 4년째 되던 해, 세조(世祖)는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정인지는 술잔을 올린 뒤 어상(御床) 아래로 나아가, 《석보상절》 등 불서를 간행한 일을 돌연 비판했다. 예상치 못한 직언에 불쾌해진 세조는 노기를 띠고 잔치를 파했다.
 
이튿날, 종친과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세조는 정인지에게 물었다. “어제 취중에 나를 욕보인 연고가 무엇인가?” 정인지는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답했지만, 결국 파직을 면하지 못했다(세조실록 4년 2월 13일). 정인지는 왜 잔치 자리에서 과음을 했을까. 왜 때로는 임금을 ‘너[汝]’라고 부르며, “술잔을 들고 담론하다가 갑자기 욕하기도” 했을까. 세종 시대 최고의 인재였던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글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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