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정인지는 어떻게 이처럼 뛰어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의 전기[行狀]을 보면, 정인지는 열 세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섯 해 동안 학업에 몰두했다. 먼저 그는 유교 경전을 완전히 체득했다. 누가 물어도 명료하고 세밀하게 응답할 수 있었고[應對明審], 강학에 나서면 논리가 분명하고 막힘이 없었다[論說通暢].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焚膏繼晷 志無少懈], 문장을 짓는 역량 또한 크게 진전시켰다[文詞大進]. 그 결과, 열아홉 살이던 태종 14년(1414)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당시 과거시험에서 최종 두 편의 답안이 올려졌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태종이 “주저 없이 그 하나를 집어 든 게[信手執其一]”, 바로 정인지의 답안이었다(태종실록 14년 3월 11일).
이 대목을 보면, 정인지의 공부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단계는 ‘말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그는 경사(經史) 공부의 전통에 따라, 앞선 시대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어떤 말을 했고, 그 말이 실제 정치의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함께 배웠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언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익힌 것이다. 그 결과 정인지는 경전을 강학할 때[講], 질문에 대해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전거를 들어 답할 수 있었고[明審],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에도 막힘없이 조리 정연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 수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말을 잘하는 능력이 지도자에게 필수적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글로 남겨 시공을 넘어 전달하는 능력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정인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쓰는 노력을 이어갔고[焚膏繼晷], 마침내 모두가 감탄할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의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정인지는 열세 살 이전에 이미 ‘자기 몸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 정흥인은 정도전의 제자로,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자 집 근처 소격서―오늘날의 서울 삼청동 일대―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한다. “나는 비록 실패했으나, 집안을 일으킬 자식을 달라”는 그의 기도 끝에 얻은 아들이 바로 정인지였다.
정흥인은 이 아이가 별자리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다고 여겨, ‘기린 발자국[麟趾]’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해동잡록》 권6). 그리고 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삶의 규범을 익히게 했다. 정인지는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고 주변을 정돈하는 일에서부터, 사람들과 어떻게 말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까지를 배우며 자랐다. 몸이 생각을 끌고 가지 않도록, “옳은 말과 훌륭한 의론을 날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주는 교육을 먼저 받은 것이다(정순우, 《공부의 발견》, 2007).
이를 종합해 보면, 정인지의 공부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는 몸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둘째는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셋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이 과정을 차례로 거친 뒤에 비로소 그는 관직에 나아갔다.
세종이 종종 “이 문제는 오직 정인지만이 함께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를 신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인지는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성종실록 9년 11월 26일). 말하자면 세종에게 정인지는 ‘친구 같은 신하’였다. 언제든 마음을 열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친구이자, 나라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기 일처럼 헌신하는 최고 인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