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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5호] 세종과 연산군의 길, 질문하는 태도에서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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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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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연산군의 길, 질문하는 태도에서 갈렸다

 
역사는 리더십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지난 30여 년간 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붙들어 온 나의 화두다. 나는 실록이야말로 리더십 함양에 최적화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왕과 재상, 수령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경영진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그 선택이 어떤 문제를 낳고 어떻게 수습되었는지가 충실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록은 ‘왕의 눈높이’에서 읽을 때, 리더십의 본질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왕의 눈높이에서 실록 읽기

‘왕의 눈높이’란 특정 사안을 두고 직접 고민하고 결단해야 하는 자리에 서서 실록을 읽는 태도를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판단했을까”를 염두에 두고 국왕과 신하들의 언행을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 왕의 시야와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독서의 훈련을 거치다 보면, 왕의 판단과 조치가 한층 입체적으로 드러나고, 정책결정자가 감당해야 했던 고뇌와 심리에도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생각과 언행을 성찰하게 하며, 세종과 같은 뛰어난 리더의 리더십을 삶 속으로 체화하는 길을 열어 준다.
 
‘왕의 눈높이’에서 실록을 읽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몇 해 전부터 ‘질문으로 실록 읽기’를 시도해 왔다. 세종실록 강독 때마다 ① 먼저 ‘오늘의 질문’을 정리해 강독반 단톡방에 공유하고, ② 실록 속 관련 사례를 함께 검토한 뒤, ③ 세종시대 인물들의 문제 해결 방식을 참조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다시 토론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지난주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세종 시대의 유정현은 거두는 데[斂] 능했으나 쓰는 데[散] 인색한 재정 책임자였고, 안순은 거두고 쓰는 일 모두에서 균형을 갖춘"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도 ‘잘 벌고 잘 쓰기’는 쉽지 않으며, 언제 아끼고 언제 써야 하는지를 가르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세종이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실록강독의 현장: 질문하기 – 파생 의문 - 토론

이 질문을 탐구하기 위해 나는 강독 시간에 세종실록 7년 10월 16일 기사를 함께 검토했다. 그리고 당시 인물들의 행적을 ‘잘한 경우’와 ‘잘못한 경우’로 나누어 살폈다. 특히 후자의 예로서 세종 재위 전반부의 나라 살림을 맡은 유정현 이야기를 읽었다. 실록에 따르면 유정현은 “고리대금 사업가”(세종실록 7/4/13)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빚을 갚지 못하면 집안의 솥단지까지 빼앗아 갈 만큼 인정사정없는 수전노로 묘사된다(세종실록 6/2/29). 그럼에도 세종은 그를 국가 재정을 맡은 인물로 기용했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하나의 파생 질문이 떠오른다. 사회적 비난을 받던 관리를 경제 수장으로 중용한 세종의 판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은 세종 8년(1426) 5월 15일에 실린 ‘유정현 졸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구두쇠로 이름난 유정현은 세종 7년(1425) 음력 4월 봄 가뭄 때, 볍씨를 백성에게 빌려주어야 할지를 묻는 세종에게 이렇게 답했다. “신의 집에서 높은 이자를 감당하면서까지 꾸어 가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백성이 심히 궁핍하지는 않은 듯합니다”(세종실록 7/4/13). 사금융을 운영하며 체득한 감각으로 시중의 경제 상황을 가늠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발언을 들은 세종이 그를 꾸짖거나 비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세종은 다만 “볍씨를 뿌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답했을 뿐이다. 그의 단점(사람들의 비난)을 지적하기보다는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것이다. 유정현이 좌의정으로 72세에 생을 마쳤을 때, 사관은 그를 “정사를 처리함에 가혹하고 급하여 용서함이 적었으며, 집에서는 재물에 지나치게 인색하여 자녀에게조차 곡식 한 말[斗升]도 주지 않았고, 오랫동안 호조를 맡아 출납에 극히 인색했다”고 평가했다(세종실록 8/5/15). 요컨대 그는 지나치게 인색한 인물이었지만, 그 성향 덕분에 세종 초년의 연이은 흉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셈이다.
 
이어서 나는 안순의 이야기와 함께 세종이 강조한 “반드시 써야 할 곳”, 곧 하급 관리의 식사비와 기근 때의 백성 구휼 등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돈을 어떻게 써야 그 값어치를 다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 참여자는 앤드루 카네기가 도서관 건립에 나서게 된 계기로 어린 시절 경험한 ‘앤더슨 대령의 도서관’을 들며, “일모작 인생에서 축적한 부를 이모작 인생에서 사회를 위해 품격 있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강독 참여자는 2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코칭 강사, 대학 교수, 속기사, 취업준비생, 산불 전문가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들은 각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읽은 대목을 발제하고 의견을 나누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매번 일종의 ‘강독의 현상학’을 경험한다. 세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현전 선비들이 평소 독서할 때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다가도, 진강에 이른 글에서는 힘을 다해 정밀히 살피므로[用力精察], 의문이 생기는 곳이 대체로 많다[疑處蓋多]”(세종실록 13/10/28)는 장면과 닮아 있다.

‘하여왕’ 세종

내가 ‘질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세종의 어투, 곧 실록 곳곳에 반복되는 질문형 종결구에 주목하면서부터였다. 세종은 즉위 직후 “의논하자”는 말로 국정을 시작했고(세종실록 즉위년/8/12), 평소에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하들을 적극적으로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세종실록 5/4/12; 6/6/15; 6/10/30; 15/2/28). 《세종실록》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하여(何如)’라는 의문형 어투는, 신하들의 말문을 열기 위한 세종 특유의 통치 화법이었다. 흔히 그를 ‘하여왕(何如王)’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컨대 세종은 지방 수령을 만나면 “금년 농사는 어떤가”라고 물었고(세종실록 2/5/22), 사관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후세 사람들이 역사 기록을 신뢰하겠는가”라며 의견을 구했다(세종실록 즉위년/12/25). 또한 서운관의 예측과 달리 일식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들을 나무라기보다, “중국에서 들여온 역법이 우리 실정과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하며 연구방법의 재검토를 지시했다(세종실록 14/1/1).
 
세종과 대조적인 어투를 보인 왕은 연산군이다. “대비께 죽을 드시도록 정승들이 청하라”는 지시로 시작된 그의 이른바 ‘하명(下命) 정치’는 재위 기간 내내 이어졌다. 연산군은 “통렬히 금하라”, “(음식을) 들이도록 하라”(연산군일기 5/6/1)와 같은 짧은 전달 형식으로 명을 내렸고, “경들은 나를 만만히 여기느냐”, “어찌 말의 앞뒤가 한결같지 않은가”라며 신하들을 꾸짖는 일도 잦았다. 더 나아가 “나를 걸주라 부른다 하더라도 그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기도 했다(연산군일기 1/8/6).

연산군의 하명 정치, 질문하지 않은 지도자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어투를 제외하면, 연산군 초기의 정치는 다른 군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재변이 일어나면 구언 전지를 내려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고(연산군일기 1/11/1), 송사를 신중히 처리할 것을 당부했으며(연산군일기 1/11/21), 경연을 열어 『통감강목』 같은 고전을 토론하기도 했다(연산군일기 6/9/29). 성종의 묘지문을 검토하던 중 외조부 윤기무의 이름이 오자(誤字)일 가능성을 의심하다가 마침내 생모의 죽음 전말을 알게 되기까지, 연산군의 초기 정치에는 특별히 이례적인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연산군의 어투를 이해하는 데에는 세자 시절 그의 학습 상황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산군이 열일곱 살이던 1492년(성종 23년), 성종은 “세자가 문리를 이해하지 못한다[未解文理]”고 지적했다. 곁에 있던 승지 또한 이에 공감하며 대책을 논의한다. 문종과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 세자 교육을 받았고, 1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인물이 연산군이었다. 그럼에도 ‘문리 불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이를 ‘개별적 사실들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으로 해석한 바 있다(김범, 『연산군』, 2010, 90쪽).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연산군의 말과 행동을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더 주목되는 것은 스승들의 지적, 곧 ‘질문하지 않는 세자의 태도’다. “세자는 강의를 들을 때 적극적으로 질문하거나 변론하지 않는다”는 평가는, 그의 어투와 통치 방식으로 이어질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연산군 재위 내내 반복된 일방적 전교, 이에 대한 신하들의 무성의한 대응, 그리고 사사로운 인사 조치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종이 말했듯, 힘을 다해 정밀히 살피고 의문을 제기하는 독서를 통해서야 비로소 앞뒤의 맥락을 연결하고 의미를 성찰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그런 점에서 연산군의 ‘질문 없음’은 곧 ‘성찰 없음’으로 이어졌고, 성찰의 부재는 다시 타인의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방적 전교의 증가로 귀결되는 악순환을 낳았다고 판단한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는 탁월한 국정 운영의 사례와 실패한 통치의 사례가 함께 담겨 있다. 이 양면을 함께 살피되 ‘국왕의 눈높이’를 견지하고 질문을 통해 실록에 접근할 때, 리더의 판단력은 정교해지고 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힘도 길러진다. 국가와 기업의 리더에게 역사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의사결정을 단련하는 가장 깊이 있는 경영 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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