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1호] 세종은 정말로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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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1] 세종은 정말로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2002)에서 지식의 성장은 두 가지 형태의 ‘실수에 대한 개방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 하나는, 기존의 진리가 실제로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담한 추측에 대한 사회의 관용이다. 다른 하나는, 그 추측이 타인의 비판과 논박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는 개인의 용기이다. 만약 하나의 추측이 엄격한 비판을 견뎌내고 새로운 이론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경쟁 이론들보다 우리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음이 입증된 설명’, 곧 과학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역사 비판의 조건을 묻다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를 읽으며 칼 포퍼의 책을 꺼내든 것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한 조건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포퍼는 지식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세 가지 요건으로 ① 단순성, ② 새로움, ③ 경험적 성공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 교수의 주장은 적어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을 충족한다. 먼저 흔히 세종을 ‘성군(聖君)’이라 하지만, 이 교수는 그 평가가 양반 중심의 시각일 뿐, 백성의 관점에서는 다르다고 본다. 이 문제 제기는 ‘새로움(②)’의 조건에 부합한다. 또한 세종시대 노비의 삶의 질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주장과, 세종 사후 ‘노비 인구의 대규모 확장’이라는 그의 가설은 지식의 단순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한 시도로서 ‘단순성(①)’의 조건에 해당한다.
문제는 세 번째 조건인 경험적 성공(③), 곧 그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느냐이다. 실록이든 호적이든, 그의 대담한 추측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세종 시대의 노비 관련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이 교수의 논지는 바로 이 ③의 조건에서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이 글은 그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 나는 2018년 여름 〈주간조선〉의 요청으로 이 교수와 지상(紙上)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1라운드 ‘노비 논쟁’에 이어 2라운드 ‘사대주의 논쟁’으로 토론이 한창 무르익던 중, 이 교수는 ‘박 교수의 논설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며 돌연 논쟁을 중단했다. 실사구시적이고 긴 호흡의 토론을 기대했던 나는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그 논쟁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생산적 논쟁의 불모지에 가까운 한국 역사학계에 작은 자극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재우 교수는 대학원 강의 〈조선시대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에서 다룬 12개의 논쟁 중 두 가지가 바로 그 ‘사대주의 논쟁’과 ‘노비제 논쟁’이었다고 알려왔다. 우리 학계는 여전히 고대사나 식민지 근대화 등 여러 문제를 두고 각자 다른 사료와 해석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경향이 강하다.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논지를 검증하고 비판하며 지식이 성장하는 논박의 과정이 부재한 것이다.
■ Fact Check 1 | 세종은 노비종모법을 제정했는가
이영훈 교수가 제기한 주장은 요약하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① 세종이 노비의 인권과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제도를 만들었다. ② 그 결과 세종 시대 노비의 처지가 크게 나빠졌다. ③ 세종 사후 노비 인구가 급증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까? 우선 첫 번째 근거로 제시된 것이 바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즉 태어난 노비의 신분을 어머니의 신분에 따르게 한 제도다. 세종이 이 법을 확정한 것은 사실이다. 1432년(세종 14년) 3월 15일, 세종은 신하들에게 “부왕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從父法)을 개정할 필요가 있는지 충분히 의논하라”고 명했다. 맹사성 등 대신들이 논의 끝에 종부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노비의 신분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 따르게 하자고 건의하자,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즉, 세종이 노비종모법을 제정한 것은 사실이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이 제안이 나오기 8년 전부터 이미 신하들과 여러 차례 종부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허조를 비롯해 맹사성 등이 '종부법이 인륜(人倫)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개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륜파괴’란 부모와 자식, 부부 간의 관계가 법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1430년의 ‘이고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세종실록 12년 10월 13일). 여종 이고미는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뺨을 때리며 “네가 내 아비란 말이냐”라 모욕을 퍼붓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당시 종부법이 얼마나 인간의 기본 윤리를 훼손하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사회의 근본 질서가 무너질 지경이었고, 세종은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했다.
■ Fact Check 2 | 세종은 양민과 천인의 교혼(交婚)을 허용하거나 장려했는가
이영훈 교수 주장의 가장 심각한 왜곡은 바로 양천(良賤) 교혼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세종이 양반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제정했고, 그 과정에서 천인 여성과 양인 남성의 결혼을 허용하거나 장려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양천 교혼이 무제한으로 용인되었고, 그것이 노비 인구의 대확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같은 책, 40~41, 63쪽).
그러나 〈세종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 교혼을 허용하거나 장려했다는 법령이나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모법 시행 이후에도 세종은 일관되게 양민 남성과 여종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했다. 1432년 3월을 비롯해 여러 차례에 걸쳐 “양인 남자와 여종의 혼인을 금하라”는 명령을 반복해 내린 기록이 그것이다(세종실록 14/3/25; 14/3/27; 21/윤2/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어떠한 사료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세종이 제정한 종모법이 양천 금혼의 빗장을 풀었다”고 단정한다(같은 책, 64쪽). 이는 실록의 기록과 명백히 배치되는 추정일 뿐 아니라, 세종의 입법 취지를 근본적으로 오독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왜 이렇게 ‘양천교혼을 허용하거나 권장했다’고 주장하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종모법과 양천교혼의 허용이 결합되어야만, 세종에게 ‘15세기 노비 인구 대확장’의 책임을 돌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핵심 연결 고리인 양천교혼의 실증적 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노비 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이어줄 결정적 매개 변수, 즉 양천교혼의 허용을 입증할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결여된 논리 위에서 세종을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이는 사료에 기초해 주장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 원칙마저 벗어난 추정이며, 논리의 비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Fact Check 3 | 종모법으로 인해 세종시대 노비의 처지가 악화되었는가
세종 시대 노비 문제를 논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핵심 질문은, 그 시기 노비의 생활 수준이 과연 그렇게 열악했는가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