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0호] 인재의 속마음을 여는 세종의 대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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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탁월한 언어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신하가 절실하지 않은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면 적절히 말을 끊어, 논의가 바다로 흘러가듯 산만해지지 않도록 했다. 반대로 침묵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 앞에서는 ‘다사리’라 하여, 모두가 반드시 한 마디씩은 발언하도록 이끌었다. 그에게 회의란 형식적인 보고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고, 마음속의 생각이 드러나야만 의미가 있었다. 특정인이 말을 독점하는 분위기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두 층위가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하나는 인사치레와 예의로 주고받는 겉말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속말이다. 그는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속말, 즉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속뜻을 제대로 펼쳐낼[伸其情] 글자가 없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겉말을 넘어 속말까지: 열린 회의의 비밀
세종에게 진정한 대화란 겉으로 주고받는 말에 그치지 않고, 속마음까지 통하는 자리였다. 그는 “말이란 구부러지고 꺾이는[曲折] 대목을 통변할 때 비로소 맛도 있고 의미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통역사들은 그 미묘한 곡절을 살려내지 못한 채, 대강의 뜻만 전할 뿐이었다. 세종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말하는 이의 속마음과 뉘앙스까지 전하지 못하는 통역은 온전한 통역이 아니라고 보았다.
회의할 때 세종이 가장 공을 들인 일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겉말 단계를 지나 속말까지 꺼내놓게 하는 분위기 조성이었다. 즉위한 후 맨 처음 한 말이 “나는 인물을 잘 모른다”였던 사실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을 낮추어 신하의 마음을 여는 데 주력했다. “변변치 못한 내가 왕이 되어서 백성들이 근심과 고통 속에 지내고 있다”면서 “부디 그대들은 나라에 도움 되는 말이라면 조금도 꺼리지 말라”고 겸손하게 직언을 요청한 것도 인재들의 속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어전회의의 분위기를 최대한 자유롭게 만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무거운 국정 의제 대신 책 내용을 매개로 삼아 대화의 물꼬를 트는 세미나식 경연을 매주 한 차례 이상 열었다. 회의에 임하는 자세 역시 달랐다. 왕 앞이라 해서 머리를 조아리거나 땅에 엎드릴 필요가 없으며, 곧게 앉아 의견을 주고받도록 했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토론이 막히면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의논하라고 함은 서로 논박하며,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를 진술하라는 뜻이다[各陳所蘊].” 겉말에 머무르지 않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라고 요청한 것이다.
세종은 신하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설사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곧장 부정하지 않았다. 비판적인 발언이라도 먼저 “경의 말이 좋다”, “그대의 말이 아름답다”라며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그 뒤 상대가 속마음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듣는 이의 긍정적 반응이 말하는 이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호감을 품게 할 뿐 아니라, 호기심까지 자극한다고 했다. 이 호기심은 다시 자기 능력을 더 깊이 연마하게 만드는 연쇄적 상승을 일으킨다. 결국 말하는 이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어 이야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의미 있고, 그 결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1432년, 형조참판 고약해는 왕의 강무(講武)에 대해 “고려 말의 혼군(昏君)들이나 즐기던 사냥놀이이니 횟수를 크게 줄여야 한다”고 직언했다. 중국 사신의 잦은 요청으로 불가피하게 치르는 강무도 있어 민폐가 크니, 정기적 강무는 대폭 줄이자는 취지였다. 이에 대한 세종의 첫 반응은 “경의 말이 매우 아름답다[卿言甚嘉]”였다. 그러나 끝까지 경청한 뒤 내린 최종 결론은 ‘현행 유지’였다. 사신 요청으로 시행하는 강무는 연 1회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강무를 줄이면 국용(國用)에 쓸 고기가 모자라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워야 했다. 그 부담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게 세종의 반론이었다. 세종은 이처럼 신하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되, 사실을 꼼꼼히 확인한 후 국가 전체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을 내리곤 했다.
질문으로 창의를 자극하다: ‘하여왕’의 화법
수긍하며 경청하는 태도와 더불어, 세종이 상대의 속마음을 열어내는 또 하나의 비법은 질문하기였다. 그는 말끝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라며 신하들을 대화로 끌어들였다. 양로연에서 노인들을 계단 위에서 맞이할지, 아니면 내려서서 기다리는 것이 더 낫겠는지 같은 의례적 문제에서부터, 기근 구제책이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예법에 이르기까지 세종이 묻지 않은 사안은 거의 없었다. 세종실록 곳곳에 보이는 ‘하여(何如)’라는 의문형 어투는 이러한 화법을 잘 보여준다. 질문은 신하들의 말문을 열고, 나아가 숨겨진 속마음까지 이끌어내는 대화의 열쇠였다. 나는 이 점에 착안해 그를 ‘하여왕(何如王) 세종’이라 부른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현상학과 예술>에서 “질문은 그 자체로 듣는 이의 영감(inspiration)을 자극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대화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비유했다. 질문을 주고받는 순간, 사람은 숨을 고르듯 호흡하며 동시에 사유의 지평까지 넓혀간다. 세종의 질문 역시 인재들의 창의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히 찬반을 묻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생각을 확장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즉위 초반, “중국 역법서에 기록된 그 시간에 왜 일식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와 숙려를 거듭하게 만든 도전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이 밤새 고민하며 답을 찾으려 애쓴 것도, 끊임없는 왕의 질문과 관련 깊다.
세종의 대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중요한 의견을 결코 흘려버리지 않는 섬세한 헤아림이다.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다 해도, 정작 의미 있는 의견을 놓친다면 그것은 한갓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재들의 속마음, 곧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자신 있게 제안하는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의견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리더십
재위 21년째인 1439년 6월, 사헌부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역사 기록[史籍]을 분산 보관하자고 아뢴 일이 있었다. 모두 아홉 가지 제안이 제출되었는데, 세종은 그 가운데 실록을 여러 부 더 만들어 각 도의 명산에 나누어 보관하자는 의견 하나만을 채택했다. 만약 그때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화마 속에서 실록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세종은 어떻게 그런 뛰어난 대화 민감성을 지닐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귀 밝고[聰], 주도면밀한[敏] 성품이다. 태종은 아들의 이러한 총민함이 무엇보다 학문을 즐겨 배우는 태도(好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았다. 경(經)과 사(史)에 이르는 폭넓은 독서가 사람의 말을 헤아리는 안목을 길러준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일 중심의 사고와 높은 책임의식이다. 세종은 자신이 국정을 그르칠 경우 태조와 태종, 나아가 형 양녕까지 욕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성과 신하들에게 내린 많은 교서와 윤음에는 강한 소명의식이 드러난다. 바로 이 소명의식이 그로 하여금 인재들의 말을 한층 더 귀 기울여 듣게 했고, 그 속에서 좋은 의견을 발굴하고 채택할 수 있는 대화 민감성을 높여주었다.
이러한 대화법은 오늘날 국가 지도자나 기업 경영자에게도 귀감이 된다. 회의석상에서 겉말만 오가는 조직은 결코 창의적 성과를 낼 수 없다. 구성원이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순한 찬반이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며, 귀담아들을 만한 의견은 결코 흘려버리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리더 스스로의 학습 태도와 강한 소명의식이 결합될 때, 조직의 대화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세종이 보여주었듯, 말을 통해 속마음을 열어주고, 질문으로 창의력을 일깨우며, 경청으로 사람의 가치를 살려내는 것, 그것이 곧 국가와 기업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