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8호] 세종은 어떻게 인(人)의 장막을 극복했나? > 칼럼

소식

홈으로 소식 칼럼

[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8호] 세종은 어떻게 인(人)의 장막을 극복했나?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 25-08-12
  • 조회33회
  • 이름관리자

본문

왜 길가에 구경하는 백성이 한 명도 없는가?”
1444(세종 26) 음력 55, 청주 초수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종이 한 말이다. 두 달 전 내려갈 때와 달리 왕 행차를 구경하는[觀光] 백성이 보이지 않자, 승정원에 그 이유를 조사하게 했다. 조사 결과, 백성들이 왕의 수레 앞에서 하소연하는 것을 경기관찰사 이선(李宣)이 금지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국가에서 사람을 보내 백성들의 뜻을 살피려 해도, 수령들이 미리 단속해 그 뜻을 숨긴다는 말을 들어왔으나, 이제 비로소 그 실상을 알았다.”라며,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한[欲掩己過·욕엄기과] 경기관찰사를 파직시켰다.

 

옹폐(壅蔽), 권력의 그림자

세종까지도 경험한 옹폐(擁蔽)’, 즉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지도자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키아벨리는 궁정은 온통 아첨꾼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군주론> 23). 공자 역시 소인배들이 피부를 에이듯이 흐느끼는 통절(痛切)한 호소나, 물이 점점 스며들 듯이 깊이 믿도록 하는 참언(讒言)”을 통해 군주의 총명을 흐린다고 했다(<논어> 안연).

 

옹폐(擁蔽)’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333회나 검색된다. 정치 세계에서 피하기 어려운 역병(疫病)과 같은 옹폐를 막기 위해 조선의 군신들은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간언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왕의 태도인 종간(從諫)’을 촉구했고, 신문고나 윤대(輪對) 같은 제도도 도입했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는 능행길이나 수원화성 행차 때 상언과 격쟁을 통해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했다.

 

세종은 어떻게 옹폐의 장막에서 벗어났을까?
첫째, 세종은 백성들의 실태를 가장 잘 아는 낮은 직급의 관리, 즉 수령을 자주 만났다. 재위 기간 세종이 수령을 친견(親見)한 횟수는 무려 392회에 이른다(월평균 1.03). 조선왕조에서 왕이 지방 수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세종 때가 처음이었다. 세종은 수령의 임무는 지극히 무겁다내가 백성의 일을 직접 살필 수 없으니 그대들을 보내는 것이니, 부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을 힘써 행하라고 당부했다. 또한, 수령의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친견하는 수령 수를 하루 3명 이하로 제한하기도 했다.

 

세종이 옹폐에서 벗어난 방법

둘째, 세종은 윤대(輪對)라는 제도를 도입해 국사를 보고받고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했다. 재위 초반인 1425(세종 7) 623,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은 왕의 총명을 넓혀[廣聰明 광총명]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막는 폐단[壅蔽之患 옹폐지환]을 없앨 뿐 아니라, 신하들의 뛰어난 점과 부족한 점까지 임금이 헤아릴 수 있는[聖鑑 성감] 윤대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세종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약 4개월 뒤인 106일부터 윤대를 시작했고, 1437(재위 19)까지 거의 12년간 지속했다. 윤대할 때 세종은 신하들에게 소속 관청의 사소한 문제까지 아뢰라고 지시했다. “신하에게 자문하고 윤대하는 제도를 마련함은 임금의 과실(過失)과 정책의 잘잘못(得失), 민간의 어려운 사정(疾苦), 그리고 신하들의 사사로움과 공정함(邪正)을 듣기 위함이며, 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기 위함이라면서 각 관청의 작은 문제까지 두루 보고할 것을 명했다(세종실록 12년 윤128)

 

실제로 1430(세종 12) 3, 세종은 허위로 공적을 사칭한 죄로 제주목사 김흡을 파직했다. 그러나 상호군 고득종이 윤대 자리에서 김흡이 제주에서 왜인을 체포한 사실을 상세히 아뢰자, 세종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김흡을 복직시켰다. 당시 김흡은 제주 바다에 출몰한 왜선을 맞아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왜적 9명을 목 베고 나머지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경차관 박호문은 김흡이 직접 작성한 장계 초안[啓草]을 확인하지 않은 채, 다른 이가 작성한 보고서 초안[報草]만을 근거로 잘못된 보고를 올린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세종실록 121013).

 

셋째, 옹폐(壅蔽)를 극복하기 위해 세종이 가장 중시한 것은 어전회의의 활성화였다. 즉위 후 첫마디가 의논하자였던 세종은, 경연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신하들이 마음속 진심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도록 이끌었다. 인재들이 자기 생각을 기지개 켜듯 펼칠 수 있도록, 그는 세미나식 어전회의인 경연을 매주 한 차례 이상 꾸준히 열었다.

 

세종은 신하들이 왕 앞이라 해서 머리를 숙이거나 땅에 엎드리지 말고, 곧은 자세로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73). 공손한 체하며 침묵하지 말고, 왕의 얼굴을 마주한 채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을 진실되게 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면, 세종은내가 의논하라고 함은 서로 논박하며[互相論駁 호상논박], 각자 마음속에 쌓인 바를 다 말하라[各陳所蘊 각진소온]”는 뜻이라며,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꺼내 달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는 또한 긴급한 사안이 발생하면 관련된 이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會于一處 회우일처], 사안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가감 없이 논의하게 하였다. 반대 의견일지라도 끝까지 경청하였고, 논의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하루 종일이라도 토론을 이어가게 했다(세종실록 즉위년 1217).

 

문어농부, 답은 현장에 있다

()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한 세종의 노력은 재위 기간 내내 꾸준히 이어졌다. 재위 7년째인 14257, 그는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런 듯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살펴보러 나가겠다고 말하며 서대문 밖으로 직접 행차하였다.

 

그러나 주위 관리들이 금년 벼농사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세종이 직접 본 논밭은 말라붙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세종은 오늘 이곳에 와 보니, 실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라고 탄식하며, 관리들의 허위 보고를 질책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날 세종은 단지 당번 호위군관 몇 명만을 거느린 채 움직였다. 벼가 잘 자라지 않은 논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고 한다[問於農夫·문어농부]. 경호를 최소화한 채 단기필마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간 그는, 들판의 농부들에게 무엇이 가장 부족한지, 어떤 도움을 받으면 좋겠는지를 직접 물으며 민심을 살폈다.

역사 속 대부분의 최고 권력자들은 옹폐(壅蔽)의 장막에 갇혀 민심과 멀어지기 쉽다. 그에 비해 세종은 직접 현장을 찾아 문제의 실상을 살피고, 백성과 함께 해법을 모색했다. 오늘날 그의 지혜를 본받는 지도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주소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대왕로 72
원장 : 박현모
이메일 : ifsejong12@naver.com

Copyright ⓒ 세종국가경영연구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