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5호] 세종, 어린 시절 소외를 넘어 백성의 소리를 번개처럼 느끼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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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강의를 준비하며, 왕이 되기 전 세종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세종 이도(李裪)가 태어난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부터 즉위한 1418년 8월까지의 실록 기사 40여 건을 정독했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온 대목은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는 세자 이제(李褆, 양녕)의 말이었다. 1416년 9월, 태종 재위 16년째의 일이다. 양녕은 동생들과 함께 조모 신의왕후 한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금의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흥덕사를 찾았다. 향을 올린 뒤, 그는 몇몇 사람들과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동생 충녕이 말했다. “세자의 신분으로 간사한 자들과 바둑을 두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군다나 오늘은 할머니 제삿날 아닙니까”라고. 양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
강의를 들은 한 학생은 양녕의 이 말을 “너, 재수 없어”로 해석했다. 10대 시절 세종의 ‘재수 없는 언행’은 이 장면 외에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같은 해 설 무렵, 양녕이 새로 지은 설빔을 입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때?”라고 묻자, 충녕이 나섰다. “형님, 먼저 마음부터 바르게 하시고[先正心], 그다음에 겉모습을 가꾸셔야죠[後修容].” 실록에 그려진 어린 충녕은 한마디로 ‘왕따가 되기 쉬운’ 아이였다. 잘난 척을 자주 했고, 일러바치기를 좋아했으며, 비만에 편식도 심했다. 운동 신경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충녕의 이런 경쟁적인 언행은 다분히 부왕 태종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비록 한 명의 왕자였지만, 기회가 된다면 대권을 물려받아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종친과 대신들이 모인 경회루 술자리에서 학문 실력을 뽐내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종은 양녕을 돌아보며 “왜 너는 학문이 이만 못하냐?”고 꾸짖었다. 한편, 외삼촌 민무회로부터 부왕 험담을 들은 충녕은 즉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일로 인해 외갓집은 결국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문제아 충녕’을 ‘대왕 세종’으로 변화시킨 요인들
그렇게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이도가 어떻게 훌륭한 리더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 나는 첫 번째 요인으로 ‘세종 백독(世宗百讀)’을 꼽는다. 그는 좋은 책을 골라 “반드시 백 번을 넘게 읽었다[必過百遍]”고 한다. ‘세종 백독’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 나타난다. “나는 여러 책을 모두 백 번 읽었고, <초사(楚詞)>와 <구소수간(歐蘇手簡)>만은 30번 정도 읽었다”고 말한 <단종실록>의 내용이나, “임금(세종)은 세자 시절 책을 읽되 반드시 100번을 채웠다”는 서거정의 기록이 그 예다.
세종은 왜 같은 책을 백 번씩이나 읽었을까. 그 이유의 하나로, 왕자 시절 그가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꼽을 수 있다. 부왕 태종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던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그의 방법은 독서삼매경이었다. 살벌한 정치 공간에서 심리적으로 버텨내기 위한 도피처가 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길’이 책에 있음을 발견했다. “거듭해서 책을 읽고 숙독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바루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라는 말이 그것이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책을 깊이 읽으면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그 안에서 생긴다는 게 세종의 신념이었다.
두 번째는 훌륭한 스승의 존재이다. 이수(李隨)와 김토(金土)가 대표적인 세종의 선생님이다. 세종에 따르면“이수는 오가면서 진강(進講)했고, 김토는 나와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한”스승이다. 이수는 고금의 유익한 말과 뛰어난 정치 사례(嘉言善政)를 선별하여 세종에게 가르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원에서 출퇴근하며 보고 들은 민간의 일들도 들려주었다. 세종은 훗날 이수를 회고하며, 자신을 알아보고[知] 특별히 대우해준[遇] 사람이며, 마음 밭을 기름지게 가꾸어준[啓沃] 은사였다고 말했다. ‘출퇴근형 스승’ 이수가 들려준 고전과 역사 사례, 그리고 민간의 이야기들은, ‘공동생활형 스승’ 김토와 더불어 토론을 통해 어린 세종의 것으로 소화되어 갔다. 왕위에 오른 직후 그의 제일성이“의논하자”였는데, 이는 김토에게 배운 종일토론의 학습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충녕을 변화시킨 세 번째 요인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입장에서 정치를 바라본 경험이다. 1416년 2월, 충녕은 부왕 태종을 따라 충청도 태안반도를 찾았다. 약 20일간 이어진 강무(講武) 동안 그는 여러 고을을 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두루 살폈다. 궁궐 밖으로 나서는 미행(微行)은 세자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백성의 고통과 기쁨을 가까이에서 마주했고, 국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이전, 충녕이 수많은 곤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는 어머니 원경왕후의 큰형 편애와, 양녕 및 외삼촌들의 견제와 위협 속에서 성장해야 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네 살 위의 누나, 경안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비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 노비나 버려진 아이처럼, 나라 안 가장 약한 이들을 먼저 살피는 마음을 지녔다. 그것은 백성과의 만남을 통해 받은 깊은 전율의 결과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