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국가 위기 상황에서 보인 김유신의 ‘말과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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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김유신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진 인물도 드물다. 그의 출생 스토리부터 고구려 첩자 백석(白石),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의 혼사(婚事), 천관녀 이별 설화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읽고 자란다.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부터 15세기의 <동국통감>, 그리고 19세기 초에 간행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사(正史) 및 야사(野史)에 그의 영웅담이 실려있다. 김유신에 관한 전승 민담은 그보다 더욱 많다. 10여 편의 이야기가 다양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다(박성주 외, “김유신 관련 문헌사료와 설화의 비교”. 2008).
한마디로 김유신은 고대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며,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웅 코드’를 가진 리더이다. 위기 상황에서 특히 그는 지도자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비담의 난’ 때 그가 보인 소통 리더십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발휘된 김유신의 리더십
선덕여왕 재위16년(647년) 1월에 대신 비담과 염종은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명활성을 거점으로 삼아 월성의 왕족 세력을 공격했다. 그런데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사망했다. 게다가 흉조라고 믿어지던 유성(流星)이 월성 쪽에 추락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이와 반대로 왕실측의 병사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바로 이러한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김유신의 놀라운 정치력이 발휘된다. 맨 먼저, 그는 새로 즉위한 왕(진덕여왕)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은나라의 주(紂)왕은 봉황이 나타났지만 망했고, 정(鄭)나라는 용들이 서로 싸웠음에도 창성했습니다. 이로써 덕이 요망함을 이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자리의 변괴 따위는 두려워할 게 못 됩니다.”
한마디로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재이(災異) 따위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그는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유명한 심야의 ‘불꽃 연날리기’를 시행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지난번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낸다. 심리전과 선전선동술을 병행한 것이다.
김유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올리고 축문을 짓는다:
“하늘의 도리로 말하면 양은 굳세고 음은 유약하며, 사람의 도리로 말하면 임금은 존귀하고 신하는 비천합니다. 이것이 뒤바뀐다면 진실로 큰 혼란이 일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은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침범하고 있으니〔…〕바라옵건대 하늘의 위엄으로써 사람의 행동거지에 따라 착한 이에게는 좋게 대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사, 신명의 부끄러움을 짓지 마소서.”(<삼국사기> 「김유신전」 757-759).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김유신이 취한 조치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국왕을 비롯한 조정신료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옛날의 고사와 합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별자리의 변괴 따위로 마음이 흔들리지 말도록 설득했다.
둘째는 군사들과 일반들을 향한 정치적 쇼였다. 국왕과 조정신료들에게는 논리적인 근거로 설득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the visible)을 신봉하는 보통 사람들, 즉 아군과 적군에게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게 해서 승리는 국왕의 편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던 것이다.
세 번째의 제사와 축문은 아마도 김유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국왕과 조정신료, 그리고 군사와 백성들은 이러저러하게 설득하고 다독거릴 수도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불안감은 어찌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행동에 쐐기를 박듯이 “하늘의 도리”와 “사람의 도리”로서 비담이 “난신적자”임을 규정한 다음, 하늘에 대해 다짐하듯 다그친다. 즉 “이제 하늘이 아무런 의지가 없는 듯이 별의 괴변을 보이시니, 신은 심히 의혹스럽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 말이 정말 김유신의 말일까 ‘의혹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김유신의 입을 빌려 한 김부식 자신의 말이라 할지라도, 이 말은 재이(災異)를 바라보는 유교 지식인의 관점과, 그것을 오히려 ‘재해석’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뛰어난 정치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할 때, 가장 빼어난 김유신의 장점은 비전을 세우고 공감시키는 능력이다. 김유신은 젊은 시절 고구려와 백제 등에 의해 강토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의분(義憤)에 북받쳐,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 “나라 환란을 없애는데”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의 간청, 즉 나라 환란을 해결할 방책을 알려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들은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이 “젊은 나이에 삼국을 아우를 마음이 있으니, 장하다”면서 비법을 알려 주었다(<삼국사기> 권41 김유신 열전).
삼국통일이라는 비전 제시
이 대목은 물론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김유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만든 장치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을 아울러서 삼국 간의 전쟁을 없게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가 김유신 외에는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651년 당 고종이 백제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삼국은 그 땅이 잇닿아 맞물려 있어 빈번한 전쟁으로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고, 그 백성들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서로 다투는 형국’이었다(<구당서> 백제전). ‘삼국을 아울러서 전쟁을 없게 한다’는 김유신의 비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확인된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해인 669년 2월에 내린 교서에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와 사이가 나빠 “북쪽을 치고 서쪽을 공격하느라 잠시도 평안한 해가 없었”는데,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어 사방이 잠잠하고 태평해졌다”고 말했다(<삼국사기』 제6 신라본기. 176-177쪽). 문무왕은 이 교서에서 두 나라를 평정한 이유가 “오래오래 전투를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통해서 백성들을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부왕 김춘추와 외숙부 김유신의 비전이 달성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김유신을 당대 어떤 인물보다 빼어난 지도자였다고 보는 이유는 그의 뛰어난 비전공감 능력 때문이다. 김유신은 우선 대중연설에 뛰어났다. 귀공자 타입의 왕족으로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중연설에 능하지 못한 김춘추와 대조되었다. 김유신은 중요한 고비 때마다 장졸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연설로 전세를 역전시키곤 했다. 전장 터에 모인 장졸들에게 그는 온 힘을 다해 호소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우리 강역을 침탈하고 우리 백성을 해치며,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리는 것이 오래되었다. 어찌 통분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이 전투가 국왕과 귀족의 일이 아니요, 바로 내 자신의 일이요, 내가 사랑하는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라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삼국통일이라는 비전에 주위 인재들이 공감하게 만드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격구 시합에서 김춘추의 옷깃을 일부러 떨어지게 한 다음 자기 막내 여동생 문희와 접촉하게 만든 이야기나, 임신한 여동생 ‘화장(火葬) 쇼’를 선덕여왕의 남산 행차 시간에 맞게 거행해 김춘추와 혼례시킨 에피소드 등은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일하는 지를 보여준다. 백제의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삼국통일 염원을 품게 해서 황룡사 9층탑을 쌓게 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유신의 인재소통
김유신은 인재를 쓸 때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662년 평양성 전투 승전보고를 하면서 열기와 구근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신분에 비해 등급이 지나치다’는 문무왕에게 그는 “관작과 녹봉은 공평무사한 그릇[公器]으로, 공을 세운 이에게 주는 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라고 하여 관철시켰다(????삼국사기』 권47. 열전(열기전)). 이처럼 출신 성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지방 출신 인사나 하위 골품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계기로 새로 옹립된 진덕여왕의 신임을 얻어 정국을 주도했다. 그는 중앙 관서를 정비하는 한편 주변의 인재를 적재적소 배치하였다. 진덕여왕 5년(651년)에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담당하는 좌리방부를 창설했다.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집사부도 개설되었는데, 집사는 국왕 직속 기관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김유신에 대한 상반된 평가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김유신을 가리켜 한 말이다. “김유신은 지략과 용기 있는 명장(名將)”이 아니라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무서운 정치가”라는 게 신채호의 평가이다. 김유신을 이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잘 알려진 것처럼,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이라는 역사관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평가도 있다. “세 나라를 합쳐서 한 집안을 이룬 주역”이라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논평이 그 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내가 보기에 두 측면이 다 김유신의 모습이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 첩자를 역이용하는 노련한 전략가였고, 여동생을 이용해 김춘추를 포섭하는 노회한 책략가였다. ‘비담의 난’ 때 그의 모습은 또 어떤가?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꿰뚫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60여 년에 걸친 긴 시간을 이겨내며 삼국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 노회함과 노련함, 그리고 당나라군 총사령관과 담판 짓는 용기야말로 위대한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다. 김유신의 그런 리더십이 있었기에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역동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 진입한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게 했다. 김유신을 ‘한국형 리더십의 전당(殿堂)’ 중심부에 위치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