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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덕여왕이 발휘한 ‘정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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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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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발휘한 정치의 힘

 

박현모 원장(세종국가경영연구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꼭 가보고 싶은 시기가 있다. 선덕여왕이 다스리던 6세기 중반이 바로 그때이다. 무려 40퍼센트 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잘 묘사했듯이, 당시 신라는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상태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본격적인 침공과 당태종의 여왕비하 발언,’ 그리고 상대등 비담의 반란과 같은 내우외환이 그것 예다. 부왕 진평왕은 53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나, 말년에는 내란에 휘말리고 말았다. 특히 진평왕은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사망함으로써 분쟁의 불씨를 남겨놓았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족들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결국 ()귀족인 알천 세력과 진골 가문의 김춘추는 자파 세력에 가장 덜 불리할 것으로판단되는 선덕여왕을 나라 사람[國人]들의 추대형식으로 즉위시켰다.

 

회의의 힘을 믿었던 사람들, 신라인

여기서 국인(國人)’이란 일반 백성은 아니고 대등회의(大等會議)에 참석 자격이 있는 귀족 내지 각 부족의 장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이기백, <통일신라의 전제정치>). 그들은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했을 때처럼 화백(和白) 방식,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여럿이 한 곳에 모여 상세하게 의논하여 결정하되”[聚群官 祥議而定之 취군관 상의이정지]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부결로 간주하는”[一人異 則罷 일인이 즉파] 방식을 적용하여 우리 역사 최초로 여성을 왕으로 뽑았다(수서(隋書)신당서(新唐書)의 신라전).

 

우선 신라인들이 6세기부터 이런 의사 원칙(한곳에 모여 의논함)과 의결 규칙(만장일치)을 제도화했다는 게 놀랍다. 신라인들만큼 회의의 힘을 믿었던 나라도 없었던 것 같다. 백제인들도 물론 정사암(政事巖)에 모여 정치를 논의하고 재상을 뽑았으며, 고구려인도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나라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인들은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하였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고 한다. 집단 지성의 효과를 알았고 또 발휘시켰다는 얘기다. 선덕여왕의 추대[]는 바로 그런 회의 전통과 집단 지성 속에서 이뤄졌다.

 

그런 배경에서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선덕여왕은 즉위한 직후 민생(民生)을 보살피고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집중했다. 즉위하던 632년에 선덕은 나라 안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위문하고 구휼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서 그녀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 조공을 바치는등 부왕에 이어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탄탄히 하는 데 노력을 경주했다.

 

한 때 당태종은 향기 없는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내와 나비 없는독신 선덕여왕을 시험하기도 했고, “너희 나라는 여인을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등 여왕비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덕은 철저하게 강대국과의 동맹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막다른 곳에 처한 나라를 보전하는 한편, ‘강성대국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당나라의 힘을 이용했다(‘실리외교’).

 

신라의 주공김유신

6세기 중반의 신라가 매우 역동적인 나라로 도약하는 데는 다양한 인재들의 활약이 있었다. 632년을 기준으로 볼 때 김유신은 38세로 문무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보다 8살 아래의 김춘추 역시 연부역강(年富力強)의 쟁쟁한 대권 후보였다. 나중에 한국사상사의 큰 획을 그을 원효와 의상은 각각 16세와 8세의 나이로 학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6세기는 우리 역사의 큰 별들이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시대였고, 그 중심에 선덕여왕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한편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各得其所 각득기소] 군주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유신과 김춘추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주인공은 박혁거세도 아니고, 태종무열왕 김춘추도 아니며, 김유신을 발탁해 중용한 선덕여왕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는 김유신이야말로 신라 정치사의 주인공이며, ‘신라의 주공(周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서도 군주(君主)인 성왕(成王)을 보필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군자(君子) 주공이야말로 유교정치의 모델인 데, 유학자 김부식은 김유신을 신라의 주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김부식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선덕여왕의 위대성은 바로 이점에 있었다. 왕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김유신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리기는커녕, 그녀는 오히려 그를 신뢰하고 적극 후원해 주었다. 말하자면 군주선덕은 군자김유신으로 하여금 신라는 선덕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라는 소신을 가지고 일하게 했다. 선덕여왕이 부모 자식도 함께 설 수 없다는 권력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에게 나라를 맡기는 모험을 했던 것처럼, 김유신 역시 왕이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주와 군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지 않았던 것이다.

 

김춘추의 목숨 건 동맹외교

 

김춘추 역시 당시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빼어난 인재였다. “영특하고 늠름한귀공자 타입의 왕족으로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김유신과 손을 잡고, 신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을 수도 있었던 선덕과 진덕여왕 시대를 삼국통일의 초석기로 만들었다. 김춘추는 후미진 바다 한구석에 있는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그는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내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군사를 요청하겠다면서 단기필마로 고구려에 입국한 일이나, 뿌리 깊은 적대 국가 일본을 설득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일은 유명하다.

 

고구려에 이어, 일본에서도 동맹체결에 실패했지만 김춘추는 포기하지 않았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태를 가까스로 벗어난 그는 648년에 다시 당나라로 향했다. 그 당시 당태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경쟁적으로 동맹외교를 펼치고 있던 터라 한반도의 궁벽진 곳에 있는 신라의 사신을 비중있게 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의 종친을 보내 임금을 삼아주겠다고 비웃는가 하면,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꾸짖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두 차례나 좌절한 김춘추가 길 멀고 물 험한 당나라 장안까지 간다는 건 실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모험이었다.

 

실제로 김춘추는 경주에서 출발해 영천, 하양, 상주를 지나 보은의 삼년산성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거기서 괴산을 지나, 다시 충주에서 한강의 물길을 이용해 당은포(남양)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황해 북단을 가르며 등주에 이르는 뱃길을 타고 내려 뱃길로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는데, 5천리를 100여 일간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하는 대장정이었다(박순교, <김춘추, 외교의 승부사>). 국가 일을 자기 일로 여기는 책임의식이 없으면 결코 추진하기 어려운 모험이었다.

 

선덕여왕의 인재경영 리더십

도대체 어떻게 그런 영웅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생각을 했을까? 재위 14년째인 645년 선덕여왕이 김유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백제군과 전투를 마치고 겨우 경주로 돌아온 김유신에게 백제의 대군이 또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전쟁터로 달려갔다. 겨우 그 전투에 승리하고 왕에게 보고하려는데 또다시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급히 떠나려는 김유신을 불러 선덕여왕이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소. 공에게 모든 걸 위임하리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때 김유신의 가족은 문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은 가족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더니, 5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집에서 마실 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신 뒤 우리 집 물은 옛날 맛 그대로구나라고 말하며 출발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군사들이 대장군께서도 저러하신데라며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김유신이 만약 가족을 외면하고 지나쳤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인정머리 없는 장군이라고 외면당했을 것이다. 반대로 모든 병사를 대기시킨 채 혼자서 집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장졸들은 속으로 불평하고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우물 맛한마디로 중용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런 김유신의 리더십 덕분에 그의 병사들은 이 전투가 국왕과 귀족의 일이 아니요, 바로 내 자신의 일이요, 내가 사랑하는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 결과 모든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백제군을 무찔렀다. 임금과 장군과 병사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 똘똘 뭉쳐서 부강한 백제를 끝내 멸망시켰다. 흥미롭게도 신라인의 단결된 힘은 당나라 장수의 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돌아갔을 때 당고종은 어찌하여 내친 김에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소정방은 신라는 임금이 어질며, 백성을 사랑하옵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이 윗사람 모시기를 자기 부형에게 하는 것 같이 하니, 비록 작은 나라라 하나 도모할 수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서울대 김홍우 교수는 당나라 정벌군의 괴수, 소정방의 입을 통해서듣게 되는 이 같은 신라인들의 힘을 '정치의 힘'이라고 말한다. “3국 중 가장 작았고 특히 후진적이었던 신라한반도의 구석진 곳” “버려진 땅서라벌을 가꾸어 옥토로 만들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힘의 정치에 대비되는 정치의 힘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정치는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누구도 정치인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어떤 국회의원은 때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산다고 고백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후진적인 “3류 정치때문에 경제나 사회의 발전이 지체된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한국 정치기업 내부로 바꿔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디지털 전환(DX) 등 새로운 판도가 열리고 있는데, CEO와 회사 임원들은 방향을 잡지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MZ세대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중간리더들에게 어떤 해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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