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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최치원의 ‘풍류(風流)’에 숨겨진 한국형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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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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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풍류(風流)’에 숨겨진 한국형 리더십

 

박현모 원장(세종국가경영연구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운수가 꽉 막혔다.”

김부식이 본 최치원의 삶이다. 혼란한 세상에서 태어난 그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屯邅 둔전]. 어려움이 이어졌고[蹇連 건연], 조금만 움직이면 비난을 받곤 하여 불우함을 스스로 한탄했다. 삼국사기최치원 열전의 기록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가 신라에서 실패한 까닭

열두 살에 중국으로 유학 가서 87418세의 나이로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그였다. 881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출사(出師)를 자원하여 4년간 군막에서 글을 지었다. 반란군 대장 황소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격문(檄文)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신라 사신을 통해 고국의 소식을 듣고 있던 그는 헌강왕의 개혁정치에 고무되어 8848월 귀국했다. 귀국한 다음 해에 시독(侍讀) 및 한림학사로 임명하며 그를 신임했던 헌강왕이 얼마 안 있어서 사망했다(8867). 이때부터 그의 관직 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새로 즉위한 정강왕이 1년 만에 사망하고, 진성여왕이 그 뒤를 잇자 진골 귀족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헌강왕 이후 진성여왕 때까지 정계 진출이 두드러졌던 최치원 등 육두품 출신 및 화랑 출신 인물들은 진골들의 철저한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888년 왕거인 사건).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가뭄 속에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고, 궁예와 견훤은 신라를 부정하며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 밥을 벌어먹는[筆耕]’ 최치원 같은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한때 병부시랑이란 직책을 받아 반란 진압의 책무를 맡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많은 이들의 의심[]과 시기[] 때문에최치원이 신라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김부식은 보았다. 하지만 의심과 시기가 없는 시대가 있었던가. 정치투쟁에 미숙한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는 궁예나 견훤, 그리고 왕건처럼 자기 세력을 모을 줄 몰랐다. 정적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도 무지했다. 그가 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사회개혁안은(894) 정적들을 오히려 단결시키고, 그를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했다. 진성여왕 역시 정치를 몰랐다. 그녀는 즉위한 직후 대사면령과 함께 1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가뭄이 극심해져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세금 징수를 독촉했다. 경문왕계 왕실을 신성화하기 위해 각간 위홍에게 <삼대목>의 편찬을 지시했다.

 

곧바로 반발이 시작됐다. 각간 위홍과 여왕의 불륜설이 나돌더니, 상주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국정농단설로 국왕이 권위를 잃자 국가 기강이 급속히 무너졌다. ‘<삼대목> 프로젝트역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기영합적인 세금 면제 후의 갑작스런 세금 독촉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결과였다. 이는 조선시대 세종이 농사직설 프로젝트로 먹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난 후 아악 정비라는 문화사업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둔 것과 대조된다.

 

정계에서 물러나 한국 사상사에 획을 긋다

최치원은 42세 무렵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조선 순조 때의 지식인 홍석주는 지위와 명성을 떨칠 길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최치원) 스스로 산림(山林)의 적막한 곳으로 나아가 배회하며 그 몸을 마쳤다라고 했다(‘계원필경집 서’). 하지만 최치원이 정치를 버린 게 아니라 정치가 그를 밀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조선의 정약용이 그랬듯이, 최치원은 정치에서 밀려난 덕분에 수많은 글을 남길 수 있었다. 현전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인 <계원필경>이 그 예다. 필경(筆耕)이라는 책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밭을 갈고 김을 매듯 글을 썼고,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한국사상사의 벼락 같은 축복을 남겼다.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이 글에서 최치원은 한국 사상의 시원(始原)’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국 사상의 뿌리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린다.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디세이>에서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찾고, 공노장주(공자·노자·장자·주자)의 책으로 동아시아 사상의 본류를 이야기한다. 이에 비해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는 정신적 특징을 담고 있는 문헌이나 사상이라고 일컬을 만한 게 없었다. 무속신앙이 한국 전통사상으로 지칭되기도 하나 사람과 신령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던 무당(Shaman)은 토테미즘(Totemism: 특정 동물이나 자연물 숭배)과 함께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문명권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신앙 형태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풍류[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고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풍류의 내용은 유불선 3교를 포함하는데[包含三敎], 뭇 삶들을 접하며 교화한다[接化羣生]. 먼저 유교와 불교와 도교라는 외래의 종교 내지 사상을 포함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연구자는 풍류 안에 3교가 이미 잉태되어[] 있으면서 서로 모순되거나 갈등을 빚지 않고 회통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최영성, <고운 최치원의 철학사상>, 도서출판 문사철, 2012). 우리 민족이 외래 사상이나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대체로 열려 있고, 정치가 개입하지 않을 경우 종교 분쟁이 없는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흔히 신라의 이차돈의 불교 순교나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을 종교 마찰의 예로 든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사건 모두 종교를 표방한 정치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풍류가 뭇 삶들을 접하며 변화시킨다[接化羣生]라고 말한다. 외래 사상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에 들어오면 사람들의 삶 속에 접합되면서 변화되게 만드는 게 풍류라는 말이다. 최치원은 공자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게,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바깥에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삶[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이라고 말했다. 노자에게서는 일할 때 억지로 하지 말고, 말로 애써 가르치지 말라[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는 가르침이 큰 공감을 불러왔다. 마지막으로 석가에게서는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말고 선행은 모두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諸善奉行]는 가르침이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공자와 노자와 석가의 언행에는 이외에도 많은 가르침이 있었으나, 위의 세 가지가 한민족에게 으뜸 취지[宗旨]로 받아들여서 뭇 삶을 변화시켰다는 말이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이 땅에 머물러 살면서 이치로 교화했다[在世理化]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뭇 삶에 영향을 주었고 또 받은 것이다.

 

다른 한편 접화군생(接化羣生)에서 '군생'을 화랑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난랑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글인 만큼 신라의 화랑들이 풍류를 배우고 익히면서[] 변화되었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최치원은 화랑정신을 갖춘 국왕, 난랑(鸞郞) 군주에 의해 신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화랑제도를 통해 신라의 국력을 융성시킨 진흥왕의 영광을 부흥시키고 싶어했다.

 

그 점에서 화랑[國仙]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뒤에 인재양성기관인 국학을 방문하는 등 정치혁신을 꾀했던 경문왕은 진흥왕의 전설을 되살릴 좋은 모델이었다. 삼국사기진흥왕 조에 기록된 것처럼 화랑의 길, 도의로써 서로 몸을 닦고[相磨道義]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며[相悅歌樂]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여유[遊娛山水]를 가질 수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했다. 진성여왕 초기에 편찬된 <삼대목>은 그런 리더십에 대한 찬미와 갈망의 결집체였다.

 

풍류, 한국형 리더십의 문전옥답

우리나라에 풍류라는 현묘한 도가 내려오고 있다는 최치원의 선언은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면 시대를 초월해서 항상 소환되는 소재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 풍류의 사상적 융합이나 리더십 요소가 크게 줄어들고, 산천 제사나 예술과 놀이적 요소만 부각된 측면이 있다(이은경, <풍류: 동아시아 미학의 근원>, 보고사, 199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포용그리고 조화로운 섞임을 얘기할 때, 풍류는 늘 회자(膾炙)되는 지적 아이콘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저력을 연구하는 내가 볼 때 최치원의 화랑 풍류는 오랜 세월의 마모를 이겨낸 한국형 리더십의 문전옥답이다. 자기부터 바로 서고 다른 사람들도 잘 살아가게 만드는 리더의 지적 능력과(학습), 노래와 그림을 통해 한데 어울려질 수 있는 공감력(예술), 그리고 일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노닐 수 있는 여유로움(놀이)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리더십의 3요소인 것이다.

 

어딜 가도, 무엇을 해도 걸리고 넘어졌던 최치원이 부닥친 현실정치의 벽이 결코 남 일 같지가 않다. 그는 그 벽 넘는 일을 내려놓고 문득 뒤돌아서서 역사의 산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땅 사람들의 정신적 특징을 꿰뚫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올 여름이 끝나기 전에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했다는 상림(上林)을 걸어보려 한다.
 

이 글은 <휴넷CEO>(20248)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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