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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11호) ㅣ 이순신은 왜 무안현감을 곤장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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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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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왜 무안현감을 곤장쳤을까

국정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PGM연구소 책임연구원

명량해전 이후 처형과 구금이 집행됐다.

 

정유년 9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뒤로 물렸다가 40여 일 후인 10월 29일에 고하도에 진을 쳤다. 왜군은 전라도 연해안을 도륙하면서 쓰나미처럼 빠져나갔고, 그 아비규환 속에 연해안 백성들은 가족을 데리고 섬이나 산속으로 피난하거나 향병과 의병이 되어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왜적에게 붙어 평소 관계가 나빴던 사람들을 처참하게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시 전라도 연해안을 회복한 통제사 이순신은 군대의 기강을 유지하면서 사법권(司法權)을 행사하여 적에게 동조하거나 내통한 백성들을 처형하는 등 불안한 민심을 얼른 수습해야 했다.

 

<난중일기>에도 그때의 불안한 상황을 봉합하는 이순신의 단호한 모습이 보인다. 정유년 10월 22일, 해남현감(류형)이 적에게 붙었던 운해, 김언경을 묶어서 보내왔다. 이순신은 나장(羅將, 의금부 간수)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둔 다음, 이튿날 낮에 처형해 버렸다. (<대명률>에도 외국과 합세하는 행위는 10악(惡) 중 모반(謀叛)으로 참형에 해당한다.) 또 10월 30일에는 해남현감이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행을 전하였고, 저녁에는 왜적에게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 달라고 청탁한 두 사람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자를 처형하였다. (<대명률> 제394조 신분 차이 강간은 참형에 해당한다.) 왜적들이 쳐들어온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명확한 판단과 신속한 형 집행으로 민심을 안정시켜야 했다.

 

무술년(1598) 1월 4무안현감에게 곤장을 쳤다.

 

무안현감(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인데, 사사로이 목숨만 보존할 꾀를 부려 수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산골에 숨어서 달포쯤 사태를 관망하다가, 왜적이 물러난 뒤에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이제야 나타났다.’고 정유년 10월 21자 <난중일기>에 적혀 있다. 이순신은 그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괘씸하여 도망쳤던 무안현감을 다음날 가리포 첨사진의 전선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이순신은 조정(비변사)의 형 집행을 기다렸다. 그런데 조정은 즉답이 없었다. 결국 두 달여 후에 전선 감옥에서 끌어내어 곤장을 쳤다.

 

무안현감 남언상은 무인(武人)이었다. 전쟁 중에는 수군장수가 되어 함선을 몰고 적과 대적해야 할 관리가 제 한 몸을 보존할 궁리를 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전형적인 도주 형태였다. 이순신이 보기에 무안현감은 겁장(怯將)이었다. 이순신은 남언상의 이러한 처사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대명률> ‘병률’ 편에도 방어에 실패하여 도주하거나, 수비가 허술하여 성곽이 함락당하면 참형에 처하고, 관군이 임지를 탈영하면 초범은 장100에 처하고 다시 출정시키며, 재범은 교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하물며 정유재란의 전쟁통에 무장인 지방관리가 도망을 쳤는데도 두 달이 넘도록 조정의 조치를 기다리며 구금 조치만 한 것이다. 이순신은 왜 도망친 수령을 곧장 처형하지 않고 해를 넘겨 곤장을 쳤을까?

 

정유년 12월 9일의 <선조실록>에 도망친 수령들 여러 명의 정상참작과 재기용 등에 대해 비변사(備邊司)에서 선조에게 보고하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비변사는 의금부 당상과 함께 의논하여 자세히 참작해 보니, 이들이 도망친 연유는 다르나 적들이 밀려와서 백성들이 뿔뿔이 달아날 때에 끝내 제 고을을 지키지 못한 정세는 같았다고 했다. 또한 그들이 도망의 타당한 이유를 증거할 서목과 증인, 장계 등이 있기도 하지만, 모두가 진실하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자기변명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 신하로서 도망치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지만, <대명률>에도 중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각 사람들의 범죄도 그다지 무겁지 않으니, 일부는 죄를 용서하자고 했다. 그들을 사면시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자는 것이 비변사 보고였다.

 

이에 선조는 도망쳤던 수령을 가벼이 놓아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이런 혼잡한 서계(書啓)는 우선 놔두고 거행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한마디로 도망친 수령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처벌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망친 무안현감은 처형되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

 

 

난중일기에 보이는 이순신의 처벌

 

이순신은 언제나 군의 기율을 명확하게 하였다. 북방에서 사나운 여진족과 대적하던 이순신이 신묘년(1591) 2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내려갔을 때 이순신의 눈에 비친 전라좌수영의 모습은 북방의 전투태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전들의 횡포와 느슨한 분위기, 군기의 문란함이 만연하였다. 그래서 선비같은 이순신도 회초리를 들어야 했다. 이른바 이순신의 아전 단속이 시작되었다.

 

임진년(1592) 1월, 이순신은 방답의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兵船)을 수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리고, 이웃집 개를 빼앗아 잡아먹은 토병에게 곤장 80대를 때렸다. 계사년(1593) 5월, 입대에 관한 사무를 태만한 순천의 이방을 처형하려다 그친 이순신은, 그해 6월에는 각 고을의 색리(아전) 11명을 처벌했다. 특히 옥과의 향소(鄕所, 군현 자치기구)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여 결원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번 속여 허위보고했다. 그래서 옥과의 아전을 사형에 처하여 효시하였다. 이는 아전들의 농간으로 입대 사무를 태만하게 하여 더군다나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 천대받던 수군 모집이 원활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이순신은 군의 사기 및 전력에 큰 영향을 주는 탈영병이나 군량미 절도범들을 더욱 엄하게 다스렸다. 임진년 5월, 처음으로 해전에 출전하기 전에는 도망친 여도 수군 황옥천의 목을 베어 효시하여 군중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하였고, 갑오년(1594) 8월에도 군사 30명을 배에 싣고 도망간 흥양의 보자기 막동을 사형시켜 효시했으며, 그해 9월엔 군량미를 세 번이나 훔쳐낸 남평의 색리와 순천 격군을 처형했다.

 

또 이순신은 아전뿐만 아니라 군관이나 사병 등의 직무태만과 민폐를 엄하게 처벌했다. 을미년(1595) 5월, 광양사람 김두검이 월급을 이중으로 수령한 벌로 복병(伏兵, 매복)하게 되었는데, 복병할 적에 칼과 활도 아니 차고서 무척 오만하므로 곤장 70대를 때렸으며, 정유년(1597) 8월, 칠천량 패전 후 본영의 군기를 회수하지 않은 우후 이몽구를 곤장 80대를 때렸고, 또 명량해전 전에는 군량미를 도둑질하여 나눠 가져가던 장흥의 군량감관과 아전을 잡아다 호되게 곤장을 때렸다.

 

이는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기강 전체가 문란해지고 뇌물의 다소로 죄의 경중을 결정하는 부패한 시대 상황도 문제였지만, 그러나 일찍이 “위아래가 온통 제 한 몸만 살찌울 일만 하니 앞날 일을 짐작할 만하다”고 말했던 이순신에게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이순신은 재임 중에 민폐를 끼치는 자들과 군량미를 훔치는 자들은 군관과 아전을 막론하고 곤장으로 다스렸고, 탈영하여 도망한 자들은 주모자를 처형하는 등 전시 기강을 바로 세웠던 것이다.

 

 

군졸을 사랑하면서도 기율에 엄정했던 이순신

 

유능한 지휘관은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은위병행恩威竝行] 군사들이 사랑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는[인지애외人知愛畏] 장수이다. 특히 전쟁 중에는 더욱 군사 요충지에 성을 쌓고, 둔전을 경영하며, 병선을 만드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특히 부대의 군율을 정제하여 위급한 상황에서도 사기를 유지하면서 주어진 일에 능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선조실록 31/11/27)

 

왜란이 끝난 후 <선조실록>에 보이는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이 기강을 바로잡는 엄정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부하들을 사랑하는 장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위기의 상황에 냉철하고 엄정했던 이순신은 싸움 잘한다는 명나라 절강성 수군이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내용을 이미 10월 24일 접수하였고, 다음날에는 명나라 수군이 정박할 장소를 식별하여 장계하라는 교지를 받들어야 했다. 교린의 국가에 원정군으로 오는 명나라 수군들의 눈에 비친 조선 수군의 모습이 허술하고 나약해서는 안된다고 이순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지난 정유년 여름 칠천량의 대패 이후 패전의식에 빠져있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기강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사태를 결단하지 못하고 지휘를 그르친 경상우수사 배설의 잇따른 탈영,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이 고전하는 사이 멀리 물러나 있었던 안위, 김응함 등 장수들의 주춤거림과 수동성, 칠천량해전에서 본영의 군기를 챙기지 않은 우후 이몽구의 기강이 해이해진 모습 등은 반드시 도려내야 할 썩은 살점이었다. 그리고 명량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전투에서 또다시 이런 상황이 전개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특히, 장수들의 패배의식은 역병처럼 빠르게 전파된다. 이를 좌시하면 순식간에 군대 전체에 퍼질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고 단호하게 차단해야 했다. 정유년에서 무술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통제사 이순신은 일정 수준의 함선을 건조하여 명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대적해야 하는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수군 인력의 확보 및 재편과 더불어 군율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선 건조와 인력 충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망이나 피해의식을 일소하는 정신무장과 군대 기율의 유지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조정의 머뭇거림과는 반대로 처형과 효시 등의 즉결처분과 죄지은 자를 구금하고, 곤장을 때려 체벌함으로써 군율을 엄정하게 가다듬었던 것이다.

 

무술년 1월 4일, 지난 두 달여 동안 감금했던 무안현감을 곤장때린 일은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절대로 도망치는 장수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용서를 받은 무안현감 남언상은 왜란이 끝난 후에도 북방에서 장수로 활약했다고 선조실록(36/12/28)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순신에게 곤장을 맞은 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대적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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