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일하는 방법 가운데 배워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SWP, 곧 ‘광문(廣問)-서사(徐思)-정구(精究)-전치(專治)’를 들겠습니다.”
얼마 전 만난 한 CEO가 내게 한 말이다. IT 분야의 중견기업을 이끄는 그는 여주의 세종영릉을 함께 걸으며 세종의 ‘하여(何如)’ 화법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회의에서 최고경영자가 먼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방식이다. 그는 세종처럼 질문을 통해 문제를 원점에서 재정의하고, 구성원들의 생각을 끌어내는 방식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내가 강의에서 소개한 SWP(Sejong Way of Problem-solving)야말로 IT 업계에 꼭 필요한 문제해결법이라고 말했다. 기술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경영진의 직관만 믿고 의사결정을 내렸다가 실패하기 쉽다. 반면 세종은 이해관계자의 의견과 현장 데이터를 폭넓게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집단지혜를 모아 해법을 찾았다. 그는 바로 그 점이 오늘날 기업 경영에도 가장 큰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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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문-서사-정구-전치가 실제로 세종실록에 나와 있습니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왕릉 벤치에 앉아 휴대폰으로 세종실록의 한 대목을 보여주었다.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를 널리 묻고[廣問], 천천히 생각한 다음[徐思], 정밀하게 대안을 궁구하여[精究] 민폐가 생기지 않게 하라.” (세종실록 19년 4월 12일).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직접 관리하는 어염(魚鹽) 전매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1436년부터 이어진 ‘병진대기근’으로 의창(義倉)의 재정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호조판서를 지낸 신개 등은 오래 전부터 소금 판매 이익으로 구휼 재정을 보충하자고 건의해 왔었다. (* 물고기는 생산과 유통의 중앙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제외되고, 저장과 관리가 용이한 소금만 국가 전매 대상으로 검토되었다.) 하지만 세종은 처음부터 신중했다. 그는 “대체로 법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비록 다 좋아 보이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폐단이 생긴다[初雖盡善 而終必有弊 초수진선 이종필유폐]”고 경계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4일). 그러면서도 재정 문제를 해결하되 민폐가 생기지 않도록, 백성의 반발과 제도 운영상의 부작용을 막을 방책을 함께 마련하라고 위와 같이 지시했다. 먼저 그는 여러 도에 경차관을 보내 현지 여론과 운영 실태를 조사하게 했다(세종실록 19년 5월 1일, 21년 3월 19일; 廣問의 단계). 이어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사례, 왜구 침입에 따른 염전 관리 문제, 일본에서 유입되는 소금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검토하며 장기간 숙고했다(세종실록 22년 5월 26일; 徐思의 단계). 숙고의 과정은 무려 6년에 걸쳐 이어졌다. 이후 세종은 세자와 집현전 학자들, 공조와 승정원 관원들이 참여하는 집중 토론을 실시했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은 국가가 생산과 유통을 독점할 경우 발생할 폐단을 우려하며 반대했고, 권맹손 등은 현실적 필요성을 내세우며 찬성했다. 세자 역시 역사적 성공 사례를 들어 찬성하며 정교한 대안을 마련하도록 했다(세종실록 27년 7월 29일; 精究의 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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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종은 제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시행 후 생산자에 대한 과도한 부담과 수송상의 어려움, 관의 독점에 따른 부작용이 계속 제기되자 이듬해인 1446년(세종 28) 5월 의염색을 폐지하였다. 좋은 제도라도 현실에서 폐단이 크다면 과감히 수정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의 소금 관리 원칙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사염(私鹽)에 대한 규제는 다소 완화되었지만, 소금은 여전히 국가의 중요한 관리 대상이었다. 관에서 생산·관리하는 관제염이 주류를 이루었고, 유통 역시 대부분 국가가 관장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 『경국대전』에 반영되었으며, 이후 1750년(영조 26) 균역법 시행 때까지 일부 보완과 개정을 거치면서도 기본 틀은 유지되었다. 이 사례에서 세종은 기근이라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를 검토하되, 먼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고(광문), 충분한 시간을 두고 숙고했으며(서사), 찬반 토론을 통해 대안을 정교하게 다듬었다(정구). 그리고 시행 이후에도 결과를 점검하며 백성들의 입장에서 필요하면 수정하거나 철회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전치(專治), 곧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고 관리하는 단계다. 그런데 세종은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해관계자의 반대로 무산될 위험이 있는 과업에 대해 독단위지(獨斷爲之), 즉 대의를 위해 결단하고 밀어붙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17년의 숙의 끝에 완성한 공법(貢法)의 도입이 대표적인 예다. 세종의 세제 개혁인 공법(貢法) 시행 과정은 그의 문제 해결법인 광문-서사-정구-전치의 과정에 가장 잘 부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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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도 즉위 초반에 세금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라에 돈 쓸 곳은 많은데, 조세 수입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장기간 이어진 흉년이었다. 세종이 말년에 “나의 재위 20여 년 동안 풍년 든 해가 한 해도 없었다.”고 회고한 것처럼, 그 시기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가 작황이 좋지 않았다. 조세 수입이 낮은 또 다른 이유는 잘못된 세금 제도 때문이었다. 당시 시행되던 손실답험법은 추수 후 관리가 직접 현장에 나가 수확량을 조사한 뒤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취지는 합리적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농민들은 조금이라도 세금을 줄이기 위해 관리들을 접대했고, 관리와 아전들은 이를 악용했다. 세종은 “간활한 아전이 꾀를 부려 시행함으로써 세액이 공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접대 비용과 왕래의 수고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세종실록 12년 3월 5일). 그 결과 백성은 백성대로 힘들고, 국고는 국고대로 비어 갔다. 세종이 주목한 대안은 공법(貢法)이었다. 해마다 수확량을 조사하는 대신 평년작을 기준으로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액세 제도였다. 그는 이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백성의 부담과 행정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종은 곧바로 제도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먼저 그는 신민들의 의견을 널리 묻는 과정을 거쳤다. 즉위 직후부터 관련 논의를 시작했고, 재위 9년에는 과거 시험 문제로 세제 개혁 방안을 출제해 여론을 수렴했다. 이어 1430년에는 전국적인 의견조사를 실시했다. 1430년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중앙의 고관부터 지방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에게 공법의 찬반을 물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운 규모의 공론 수렴이었다(광문). 다음은 6년이라는 숙고의 시간이다. 여론조사 결과 전국적으로는 찬성 의견이 우세했다. 총 17만 2,806명 가운데 찬성 9만 5,636명, 반대 7만 3,451명으로, 찬성이 반대보다 2만 2천여 명 많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근거로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찬반 논쟁을 계속 지켜보며 여러 해 동안 숙고했다(서사).
이 과정은 세종의 리더십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찬성이라는 명분만으로 정책을 밀어붙이지 않고, 충분한 토론과 검증을 거치는 ‘숙의의 정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보류 기간에도 어전회의에서 공법 시행 여부를 계속 논의하게 하며 예상되는 후유증을 점검했다. 1436년(세종 18) 2월에는 “근래 답험 때문에 국가의 재정 손실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조정 신료들이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의논이 분분한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때에도 찬반 양론을 근거를 들어 제시하며 치열한 논의를 이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반대파였던 황희의 태도 변화이다. 황희는 1436년 5월 회의에서, 6년 전 “손실답험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하던 입장과 달리, 토지대장과 전년도 수확 상황을 기준으로 지역별 세액을 정하자는 공법 시행안을 제안했다. 무엇이 그의 생각을 바꾸었을까? 손실답험법의 폐해와 국가 재정의 어려움, 생생지락을 추구한 세종의 일관된 태도, 그리고 개혁에 따른 이해관계 조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어 정구(精究)의 단계가 진행되었다. 1436년에는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해 토지 등급과 수확량 기준, 세율 산정 방식 등을 집중 연구하게 했다. 수많은 토론과 실험, 수정 작업이 반복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칙만이 아니라 작동하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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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세제개혁과정에서 정인지의 역할이다. 정인지는 세종보다 한 살 많은 ‘또래 신하’로서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하면서도(친구의 역할), 일이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인물이었다(신하의 역할). 실제로 공법 시행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그는 실행 방안을 제시해 개혁을 현실로 만들었다(성종실록 9년 11월 26일). 세종은 그의 계책을 따라[竟從麟趾之策] 정인지를 순찰사로 삼아서,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토지의 품질을 살펴보고 그에 알맞는 법을 제정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民甚便之 민심편지].”(성종실록 9/11/26, 정인지 졸기). 한마디로 세종의 공법 제도의 처음안과 달리 지역별 토지비옥도와 매해의 풍흉의 정도를 반영해 수정안을 수용하는 데 정인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세종 25년(1443년), 정인지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로서 경기 안산 등지에 직접 나가 새로운 측량 방식인 주척(周尺) 사용을 시험했다. 또한 “경기의 한두 고을에서 먼저 시험한 뒤 각 도로 확대 시행하자”고 제안하여, 도성 서교(西郊, 오늘날의 양천·김포·고양 일대)에서 토지의 품질을 5등급(후에 6등급)으로 나누는 방식을 직접 실험하였다. 이를 통해 예상되는 부작용을 미리 점검하고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세종실록 25년 8월 10일). 한마디로 정인지는 세종의 정책 의지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현실에서 작동하는 제도로 구현할 수 있는 계책을 제시하여 마침내 일을 성사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왕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신하가 아니라, 정책의 성공 조건을 찾아내고 실행 방안을 제시한 ‘상향 리더십’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일관되게 새 제도를 추진하는 과정이다. 1444년, “지금 시행하는 공법을 모두가 따를 것”이라는 황희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전분 6등·연분 9등’의 공법을 최종 확정하였다. 그러나 제도가 확정되었다고 해서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시범 시행 지역인 경상·전라·충청도에서 가뭄을 이유로 시행 연기나 유보를 요청하는 등 새로운 반대와 장애물이 계속 나타났다. 세종은 이를 피하거나 억누르지 않았다. 실제 작황에 따른 세액 조정, 현장 수령들과의 지속적인 소통, 그리고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우려를 제도 속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 결과 공법은 단순한 개혁안에 머무르지 않고, 이후 250여 년간 조선 조세제도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세종이 제도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행 이후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전치(專治)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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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 제정 과정에 나타난 세종의 공론화와 숙의 정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공법 추진 과정에서 세종이 마주한 장애물과 이를 극복한 방책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득권층인 고위 관료들의 반대였다. 황희·맹사성 등은 공법과 같은 정액세제가 척박한 토지를 가진 빈농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여기에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문제 제기 역시 나름의 타당성을 담고 있었다. 세종은 이를 전국적인 여론조사로 돌파했다. 유교 정치에서 중시하는 민심, 곧 “백성 다수가 찬성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반대 논리를 넘어설 가장 강력한 근거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세종이 1438년 두 번째 여론조사를 제안했을 때 많은 신료들이 반대한 것은, 민심이라는 카드가 지닌 위력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척박한 이북 지역 주민들의 반대였다. 여론조사를 통해 개혁의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실제 납세자인 백성들의 반대는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세종은 데이터에 기반해 공법 자체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처음의 정액세 구상에서 나아가 지역별 토지의 비옥도와 해마다의 작황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1436년 각 도와 토지별 차등 세율 논의, 1444년 최종안의 ‘전분 6등·연분 9등’이 바로 그 결과였다.
셋째,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였다. 세종은 “20여 년 재위 기간 동안 풍년이 든 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공법을 추진해야 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작황이 좋은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측우 기술 개발, 역법 정비, 수차 제작 등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정책을 함께 추진했다. 세제 개혁과 과학기술 혁신을 결합한 것이다.
넷째, 개혁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었다. 개혁은 성공하면 이익이 미래에 나타나지만, 실패의 비용은 현재에 즉시 드러난다. 세종은 이러한 불안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인 토론과 숙의를 선택했다. 공법 논의가 17년에 걸쳐 진행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신료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주었고, 그 과정에서 정책의 정당성과 완성도를 높였다. 나아가 반대자들까지도 “비록 나에게 불리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해 냈다.
결론적으로 공법은 그저 세금을 고치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종이 그 시대의 ‘주된 불안’을 어떻게 정의하고,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며, 갈등을 조정하고, 마침내 새로운 제도를 현실에 뿌리내리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은 먼저 널리 물었다(廣問). 현장의 목소리와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들었다. 이어 충분히 숙고했다(徐思). 다수의 찬성이나 자신의 직관만으로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치열하게 궁구했다(精究). 찬반 토론을 거듭하며 더 나은 대안을 찾아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책임졌다(專治). 제도를 시행한 뒤에도 현실을 점검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수정하고 보완하며, 공동체에 뿌리내리게 했다.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답이 아니다. 문제를 바르게 정의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연결하며, 집단지혜를 이끌어내고, 끝까지 책임지는 능력이다. 세종이 보여준 광문·서사·정구·전치의 과정은 600년 전의 역사 사례가 아니다. 오늘날 기업과 정부,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시의성(時宜性) 높은 문제해결의 원리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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