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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2호] 하늘을 탓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다하다 — 세종의 통찰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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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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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운수는 비록 이와 같더라도 사람의 일은 다하지 않을 수 없다.”
[人事不可不盡 인사불가부진]

 
세종이 왜 국가 주도의 연구개발에 그토록 힘을 기울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답은 바로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재위 19년째인 1437년 1월 22일, 세종은 자연의 변화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해야 할 일까지 멈출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늘의 운수와 사람의 일

그 무렵 조선은 심각한 위기 속에 있었다. 한 해 전인 1436년 봄과 여름 내내 가뭄이 이어져 “우물과 냇물이 모두 말랐고”, 주식(主食)인 “밀과 보리가 대거 말라 죽었다”는 보고가 각지에서 올라왔다(세종실록 18년 4월 25일). 해가 바뀌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세종이 이 말을 하기 한 달 전의 기록을 보면, “부모가 어린아이를 나무에 매어 두고 고향을 떠나야 할” 만큼 백성의 삶은 궁핍해졌다. 경상도에서는 지진이 잇따르고 달이 목성을 범하는 기상이변까지 겹쳐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세종실록 19년 1월 14일, 19~21일). 설상가상으로 굶주림 속에서 전염병까지 퍼져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세종실록 19년 2월 4일).
 
이처럼 중대한 민생 위기 속에서 세종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그는 먼저 과학적 농업 지식의 보급에 나섰다. 《농사직설》을 전국에 반포해 개량된 볍씨를 파종하게 하고, 가을갈이 같은 선진 농법을 시험하게 했다. 흉년에 대비해 구황에 유리한 무 재배도 적극 권장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과학영농의 확산이었다.
 
다음으로 곡물 유통을 조정했다. “우리 나라는 동쪽에 큰 산이 있어 동풍이 불면 산 서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하고, 서풍이 불면 산 동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지역의 곡식을 긴급히 이동시켜 구휼에 쓰도록 했다. 기후와 지형을 고려한 국가적 식량 배분이었다. 무엇보다 세종은 생명 구호를 최우선 원칙으로 세웠다. 지방 수령들에게 “자기 고을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식량을 주어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쓰라”고 명했다. 굶주린 사람을 먼저 살리고 행정 절차는 뒤로 미루라는 뜻이었다.

‘병진대기근’을 넘게 한 세종의 R&D

세종은 “하늘의 운수를 탓하지 말고 사람의 일을 다하자”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사람의 일[人事 인사]’에는 민생을 살리고 나라를 지키며 국격을 높이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종 초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세종 7년)과 《경상도지리지》(세종 11년)는 바로 그런 국가 지식 기반의 산물이었다. 이 축적된 지식은 훗날 ‘병진 대기근’이라 불릴 정도의 위기 속에서 백성을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달(4월 16일)에 있을 ‘세종의 통찰경영’ 강의를 준비하며 《세종실록》을 다시 읽다가 새롭게 눈에 들어온 점이 있다. 기상이변, 곧 천변지이(天變地異)를 대하는 세종의 태도다. 요약하면 이렇다. 천변지이 현상은 먼저 있는 그대로 정확히 관측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징조를 읽어 왕과 정치의 잘못을 돌아본다. 그러나 가뭄이나 홍수, 기근 같은 위기가 닥치면 망설이지 않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 세종에게 천변지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찰과 행동을 동시에 요구하는 신호였다.

천변지이를 읽는 통찰경영

첫째, 세종은 이상기후가 나타나면 무엇보다 사실 그대로 관측하고 기록하려 했다. 즉위 직후 경연에서 그는 “상서(祥瑞 : 길조)가 생기면 상서를, 재변(災變: 흉조)을 만나면 근심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1년 7월 25일). 또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면서 천변(天變)과 지괴(地怪)를 빠뜨린 점을 지적하며 사실을 숨기지 말고 기록해야 후세가 믿고 참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세종실록 5년 12월 29일).
 
이러한 태도는 실제 관측에서도 드러난다. 1431년에는 중국에 나타난 함예성을 우리 천문관들이 발견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고서를 근거로 혜성과의 차이까지 설명했다(세종실록 13년 1월 30일). 또 혜성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순지·김담 등 당대 최고의 전문가에게 관측을 맡겨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세종실록 31년 12월 22일). 반대로 근거 없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의 병을 태풍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가 나오자 출처를 묻고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세종실록 7년 12월 8일).
 
둘째, 세종은 자연현상 속에서 장래의 징조를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래(將來)’라는 단어의 사용을 비교 분석한 박성원 박사에 따르면, 장래(將來), 후래(後來) 또는 래(來)라는 말은 세종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184건). 그런데 다른 왕들의 기록과 달리 세종의 ‘장래’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대비를 전제로 한 말이었다. 다른 왕들이 가뭄이나 장마를 두고 장래를 걱정하는 데 그쳤다면, 세종은 그 원인과 흐름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려 했다는 것이다(박성원, 「미래학자가 만난 세종」, <제1회 후일지효 포럼>, 2018).

장래를 읽는 데이터 경영

이러한 태도는 1441년(세종 23)에 등장한 측우기와 수표에서 잘 드러난다. 그해 4월의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 이향(훗날 문종)이 그릇에 빗물을 받아 강우량을 재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었다(세종실록 23년 4월 29일). 이전에도 비가 온 뒤 땅에 스민 깊이를 ‘감(感)’으로 재는 방법이 있었지만, 토양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 정확성이 떨어졌다. 세종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표준화된 측우기와 체계적인 보고 제도를 마련했다.
 
하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제작되었다. 1441년 8월의 기록을 보면, 세종은 서운관 앞과 청계천, 한강변 등 중앙과 지방 관아에 동일한 기준의 측정 기구를 설치하고, 지정된 관원이 척·촌·분 단위로 계량해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세종실록  23년 8월 18일). 이로써 강우와 수위에 대한 정보가 막연한 체감이 아니라 표준화된 데이터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데이터를 중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종실록은 “장래에 믿고 참고할 만한 전거를 마련하기 위함[以憑後考 이빙후고]”이라고 기록했다(세종실록 24년 5월 8일). 세종은 ‘비가 많다/적다’는 감각적 표현을 넘어서 척·촌·분수로 나타나는 관리 지표를 마련했다. 이 수치는 중앙과 지방이 함께 이해하는 공통의 언어가 되었고, 전국의 강우와 수위 정보를 정책에 활용할 수 있는 체계적 데이터로 축적되었다(데이터 경영).
 
셋째, 세종은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기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치에 잘못이 없는지 묻곤 했다. “금년은 여름에 가물더니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하다. 얼음을 저장해야 할 12월인데도 날씨가 봄과 같고 어제는 짙은 안개까지 끼었다. 생각해 보니 허물은 과인에게 있는 듯하니, 간언을 들어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고자 한다”는 말이 그 예다(세종실록 7년 12월 8일).

재변을 정치의 거울로 삼다

궁궐 안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도 그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궁녀가 벼락을 맞아 죽거나 궁궐에 뱀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를 재변으로 받아들이고 “백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의논해 아뢰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26년 7월 10일; 18년 윤6월 28일). 자연현상을 단순한 불길한 징조로 보지 않고, 국왕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성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조치를 곧바로 실행했다. 궁중의 궁녀와 취사부 일부를 궁 밖으로 내보내 자유롭게 살게 하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며, 왕실의 비용을 절감해 구휼에 쓰도록 했다(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변과 지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배포하고 조치하는 등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이 말은 자연재해를 대하는 세종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지만, 그에 대응하는 사람의 일은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태종이 말한 “천변을 만났다고 반드시 빌 것만은 아니다. 군신이 각기 맡은 일을 바로 하는 것만 못하다[各正乃事 각정내사]”는 태도와도 맥을 같이한다(태종실록 11년 1월 5일).
 
세종이 최고의 업적을 남긴 리더가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창업의 격동기를 지나 수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정확히 인식했고, 그 시대를 지탱할 힘이 창과 칼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 곧 연구개발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징조를 읽어 선제적으로 대응했으며, 그 징조를 정치의 거울로 삼아 자신과 국가 운영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열린 학습의 태도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정사의 잘못과 백성의 고통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하면서, “비록 그 말이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겠다”고 했다(세종실록 1년 6월 2일).
 
통찰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현실을 정확히 관찰하고, 변화의 징조를 읽으며, 조직이 미처 보지 못한 정보를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에서 비로소 싹튼다. 세종의 통찰경영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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