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안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도 그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궁녀가 벼락을 맞아 죽거나 궁궐에 뱀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를 재변으로 받아들이고 “백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의논해 아뢰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26년 7월 10일; 18년 윤6월 28일). 자연현상을 단순한 불길한 징조로 보지 않고, 국왕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성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조치를 곧바로 실행했다. 궁중의 궁녀와 취사부 일부를 궁 밖으로 내보내 자유롭게 살게 하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며, 왕실의 비용을 절감해 구휼에 쓰도록 했다(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변과 지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배포하고 조치하는 등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이 말은 자연재해를 대하는 세종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지만, 그에 대응하는 사람의 일은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태종이 말한 “천변을 만났다고 반드시 빌 것만은 아니다. 군신이 각기 맡은 일을 바로 하는 것만 못하다[各正乃事 각정내사]”는 태도와도 맥을 같이한다(태종실록 11년 1월 5일).
세종이 최고의 업적을 남긴 리더가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창업의 격동기를 지나 수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정확히 인식했고, 그 시대를 지탱할 힘이 창과 칼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 곧 연구개발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징조를 읽어 선제적으로 대응했으며, 그 징조를 정치의 거울로 삼아 자신과 국가 운영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열린 학습의 태도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정사의 잘못과 백성의 고통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하면서, “비록 그 말이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겠다”고 했다(세종실록 1년 6월 2일).
통찰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현실을 정확히 관찰하고, 변화의 징조를 읽으며, 조직이 미처 보지 못한 정보를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에서 비로소 싹튼다. 세종의 통찰경영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