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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1호] 세종의 통찰력, 백독과 현장에서 길러진 국가 혁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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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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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통찰력, 백독과 현장에서 길러진 국가 혁신의 힘

 

나는 여러 책을 모두 백 번 읽었는데, 《구소수간(歐蘇手簡)》만은 서른 번쯤 읽었다.”

이른바 ‘세종백독(世宗百讀)’ 이야기다. 《단종실록》 1년 6월 13일에 기록된 세종의 이 말은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세종은 왜 같은 책을 백 번씩이나 읽었을까? 《구소수간》은 어떤 책일까? 이 책을 천 번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세종이 사랑한 책, 《구소수간》

우선 《구소수간》은 중국의 대문호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편지[尺牘 척독]를 모은 책이다. 세종은 왕자 시절 부왕 태종의 눈을 피해 이 책을 무려 1,100번이나 읽었다고 전한다(세종실록 5/12/23). 세종이 이 책을 그렇게 즐겨 읽은 까닭에 대해 고려대 심경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자 시절 한문 어법을 익히고 작문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구양수와 소식의 활달하면서도 폭넓은 사유가 담긴 문체가 세종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100번’이라는 표현은 실제 횟수를 가리킨다기보다, 그만큼 여러 번 읽었다는 뜻을 나타내는 옛글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한다(박현모 외, 《세종의 서재》, 2016).
 
서른 살 연하의 후학을 아끼는 구양수의 따뜻함과 스승을 향한 소식의 존경심이 담긴 진솔하고 간명한 편지를 읽다 보면, 스물일곱의 나이를 초월해 편지를 주고받은 이황과 기대승이 떠오른다. 예컨대 구양수는 “소식의 글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진땀이 납니다. 참으로 통쾌합니다. 늙은이가 마땅히 길을 비켜 젊은이가 한걸음 앞서가도록 물러설 줄 알아야 하겠지요. 참으로 기쁘고 기쁩니다”라고 경탄했다(《구소수간》 유미정 번역, 13쪽).
 
이 대목은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사단칠정론’ 편지와도 흡사하다. 퇴계는 자신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마치 “과거 시험장에 나온 선비가 시험 문제를 보고 옛 고사를 따라 조목조목 맞춘 것과도 같은 면이 있다”며 자신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고 고백했다(《퇴계집》, ‘기명언에게 보냄’). 어린 무명의 젊은 학자에게 보낸 편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존중의 마음이 담긴 퇴계와 구양수의 글을 보면 옛 사람들의 인품에 감복하게 된다.

세종의 백독 학습법과 ‘전경지학(專經之學)’

어쨌든 《구소수간》은 서른 번쯤 읽었다는 것이 세종의 회고다. 세종실록에 실린 여러 과거시험 문제와 김종서 등에게 보낸 수많은 왕의 편지 어투를 보면 《구소수간》을 통한 작문 연습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단종실록》은 위의 ‘세종백독’을 전하는 대목에서, 그보다 23년 전인 1432년(세종 14년)에 있었던 세종과 승지 윤형(尹炯)의 대화를 전한다. 새로 동부승지에 임명된 윤형이 경전과 사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아뢰자, 세종이 물었다.
 
“경은 그 책들을 몇 번이나 읽었기에 그렇게 또렷이 기억하는가?” 윤형이 “겨우 서른 번쯤 읽었습니다”라고 답하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책을 모두 백 번 읽었다[予於諸書 皆百讀 여어제서 개백독]. 다만 《초사(楚詞)》와 《구소수간》만은 30번 정도 읽었다.” 세종백독에 대한 이야기는 윤형과의 대화 외에도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임금은 세자 시절 책을 읽되 반드시 백 번을 채웠다”고 전했다. 또 《세종실록》에는 “경서를 읽을 때는 반드시 백 번을 넘게 읽고[必過百遍 필과백편], 제자백가와 역사서는 반드시 서른 번을 넘게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덕분에 세종은 옛일과 지금 일을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博通古今 박통고금](세종실록 32년 2월 22일).
 
그렇다면 세종은 왜 같은 책을 백 번씩이나 읽었을까? 그 이유의 하나는 왕자 시절 그가 겪었던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왕 태종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던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독서삼매였다. 살벌한 정치 공간 속에서 심리적으로 버텨내는 도피처가 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정신을 고양시키는 길’이 책 속에 있음을 발견했다. “거듭해서 책을 읽고 숙독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바루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라는 그의 말이 그것이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책을 깊이 읽으면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그 안에서 생겨난다는 게 세종의 신념이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세종은 독서를 통해 늘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책을 보는 중에 그로 말미암아 생각이 떠올라 나랏일에 시행한 것이 많았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책 속의 지식과 지혜를 통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찾곤 했다. “배운 대로 행하는 사람을 선비[士]라 하고, 그 행함이 돈독한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며, 그것이 통달한 경지에 이른 분을 성인(聖人)이라 일컫는다.” 이 말은 세종이 서른 번 이상 읽었다는 《순자》에 나온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와 하늘의 원리가 서로 통한다고 보았다. ‘세종을 만든 책’, 곧 세종이 읽고 깊은 영향을 받은 책 가운데 하나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보면, 훌륭한 사람, 즉 성인이란 하늘의 원리, 곧 자연 질서 속의 리듬을 발견하고 그 리듬에 맞추어 자신과 나라 다스림을 조율(調律, tuning)하는 사람이다.
 
세종의 통찰력은 바로 이러한 독서에서 길러졌다. 특히 그는 많은 책을 넓게 읽기보다, 몇 권의 고전을 정해 깊이 파고드는 공부를 중시했다. 몇 권의 핵심 고전을 선별해 정밀하게 읽고, 익숙해질 때까지 되읽는 이른바 ‘전경지학(專經之學)’이다. 좋은 책을 정밀하고도 익숙하게 되읽다 보면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글의 뜻을 이해하지만, 여러 번 읽는 사이에 그 속에 담긴 이치와 맥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실행해야 할지도 함께 떠오른다.
 
세종이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으로 나랏일에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종에게 독서는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통찰을 얻는 과정이었다. 세종의 학습법을 따라 배우고자 했던 조선 후기의 정조에 따르면, 책을 전일하고 치밀하게 읽다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豁處 활처]이 있는데, 그곳은 새것을 읽는 데서가 아니라 새롭게 읽는데서 발견된다고 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한 그의 해석이 그 예다. 즉위 초년 경연에서 온고지신을 “옛 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신하에게 정조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초학자는 그렇게 이해하기 쉽지만, 옛 글을 익히다 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맛을 깨닫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것이 참뜻이라는 것이다.
 
온고(溫故)의 과정, 곧 이미 읽은 것과 경험한 것을 다시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보는 안목, 즉 통찰력이 커진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지신(知新)’을 새것이 아니라 새롭게 깨닫는 공부법으로 이해한 그의 통찰이 놀랍다.

현장에서 길러진 통찰

세종의 통찰력은 책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문제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도 비롯되었다. ‘현장’을 정확히 관찰하기 위해 세종은 국정의 최일선에 있는 수령들을 직접 만났다[引見 인견]. 종4품 군수부터 종6품 현감까지 비교적 낮은 관직의 수령들은 부임 전에 이조판서에게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수령들을 떠나 보내기 전에 일일이 인견하며 “경은 그 지방의 임금”이라 말하고 백성을 잘 기르고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수령에게는 “금년 농사는 어떤가”라고 물으며 현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세종실록 2년 5월 22일).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모두 392회 수령을 인견했다. 한 달 평균 1회가 넘는 횟수다. 수령의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하루 인견 인원을 세 명 이하로 제한하기도 했다.
 
세종은 백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재위 7년(1425년) 극심한 가뭄 속에서 이루어진 현장 시찰이 그 대표적 사례다. 당시 관리들은 벼농사가 비교적 잘되었다고 보고했지만 세종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 밖 영서역과 홍제원 일대로 나갔다. 이때 그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홍양산과 부채를 치우게 하고 단지 호위군관 한 명만을 거느린 채 단기필마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벼가 제대로 자라지 않은 논을 지날 때마다 말을 멈추고 농부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며 무엇이 가장 부족하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경청했다.
 
세종의 이러한 현장 중심 사고는 왕이 되기 전 청년 시절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416년 충녕대군은 부왕 태종을 따라 충청도 태안반도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여러 고을 백성들의 삶을 두루 살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백성의 고통과 기쁨을 가까이에서 마주했고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조가 뿌리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종이 읽어낸 시대의 과제: 창업에서 수성으로

세종이 수령을 인견하고 백성을 직접 만나는 등 ‘현장’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부왕 태종의 시대까지는 창업의 시기였다. 창과 칼을 동원해서라도 국가의 중심을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세종의 시대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조선 왕조를 창업의 단계에서 수성의 단계로 넘어가게 하는 시대적 전환을 이뤄내야 했다. 실제로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창업기의 혼란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꽃피워야 하는 ‘수성기(守成期)’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세종실록 15년 11월 19일).
 
수성의 시대는 “본시 나라를 창설할 시기와는 같지 않아서”(세종실록 8년 1월 26일) 창과 칼이 아니라 문화, 곧 말과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말과 글로 신민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한 교화나 훈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과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이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국가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며 과학기술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수성의 시대는 힘으로 유지되는 시대가 아니라 지식과 문화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통찰이 만든 성과

바로 이 지점에서 세종의 통찰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종의 위대함은 책 속의 지식에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어내고 그것을 구체적인 성과로 만들어 냈다. 실제로 세종 시대에는 ‘K21’이라 부를 만한 다양한 국가 연구개발의 결실이 나타났다. 민생 분야에서는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고, 국방 분야에서는 철제 화포와 각종 총통의 제작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이 만들어졌다. 또 국격을 높이는 문화기술로서 금속활자의 개량과 정교한 시계 장치들이 등장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면 세종 시대는 국가 주도의 연구개발(R&D)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이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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