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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자 칼럼 - 나이 일흔에 만난 세종 3] 당신의 졸기(卒記),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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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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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자 칼럼 - 나이 일흔에 만난 세종 3]

당신의 졸기(卒記), 어떠할까?

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졸기(卒記)”를 볼 수 있다. 어떤 졸기는 그냥 담담하고 어떤 졸기는 아주 감동적이다. 죽음의 의식을 스스로 거행하는 듯, 그렇게 숭고한 내용을 담은 졸기도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세 내외라고 하지만 임금이나 신하들을 보면 대개 60 전후, 70세, 80세 등, 생각보다 장수하는 편이라 여겨진다. 일반 백성들은 그보다 단명했을 것이다. 가난과 질병에 대책 없이 노출된 삶이 대개 그랬을 터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니 세종 때 ‘졸기’ 건수가 238회로 제일 많다.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영조 때 졸기가 168회이다. 왕의 재위 기간을 감안 하더라도 여타 이유가 있을까 궁금하다. 추측해 보자면 세종이 신하들을 귀히 여기고 예로써 끝까지 대우하셨고, 제도적으로도 인사 기록 관리에 철저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졸기는 왕실의 사람이나 고위 관료, 관직자가 사망하면 생애를 정리하고 업적이나 성과를 기록한다. ‘사망 연월일. 시호. 직책. 성품. 업적. 인물의 공적. 조정의 책임. 사건의 배경을 기록하고 아들이 아무아무 있다’로 마무리한다. 과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드물게 사평(史評)이 있을 때도 있다.

 

졸기: 생애의 압축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한 졸기는 꼬장꼬장한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던 인물 허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었다.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卒)하였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자(字)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세종 21년 12월 28일 실록은 허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허조는 태종 때부터 신망받는 신하로서 황희와 더불어 주춧돌 같은 재상으로 세종을 보좌했던 인물이다. 직(直)의 덕목으로 일관했던 허조라는 인물이 흥미롭기도 했고 졸기 자체가 읽어보니 꽤 재미있었다. 공직자 한 사람의 일생을 이토록 압축해서 기록해 놓고 후세에 길이 전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세종실록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졸기를 집중적으로 모아 놓고 세종의 인재들을 한번 살펴보리라 내심 작정을 해보았다.

세종실록에 졸기가 있는 인물이라면 세종 치세 기간에 죽었다는 이야기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태종과 세종시대에 일하다가 세종 때 죽은 관리들이라 생각한다. 허조의 졸기에 본인이 한 말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한평생 공직에 나아가 봉직하고 마침내 이렇게 자신의 일생을 찬탄할 수 있을까!

어느 정권에 어떻게 얼마나 연루되었는가에 따라 천하 몹쓸 인간이 되기도 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구국의 위인이라도 되는 양 안하무인 군상을 수시로 접하는 작금의 세태를 지그시 바라본다. 세종처럼 그리고 세종의 인재처럼 적소적재(適所適材)하고 소통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존엄을 지키며 생을 마감하기


세종 22년 11월 28일. 판중추원사 안순의 졸기도 감동이다. 

 "....일찍이 자손에게 말하기를, "대저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은데, 나의 죽음으로 산 사람을 근심시키지는 않겠다. 그러니 선영(先塋)의 근처에 나아가 죽음으로서 상사(喪事)의 폐단을 덜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금천(衿川)의 별서(別墅)로 이사하였다..."

병원으로 죽으러(?) 가는 우리 시대 우리 모습과 대비되어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본다. 과학 기술, 의료과학 최첨단에 사는 현대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과 비교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회의적이고, 존엄하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그런 바람의 대안적 노력도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올여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영국 태생 현대미술 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보더라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명제 앞에 우리가 매달리는 대상은 어디쯤 어떻게 존재하는지, 얼마큼 거리를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데미안에 대한 특별한 지식 없이 봐도 그의 작품은 쇼킹하고,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책이 빼곡한 서가인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알약을 치밀하게 진열해 놓았다. 보석과 백금 장식 가득한 저 해골은 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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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ian Hirst, Victim / Medicine Cabinets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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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ian Hirst, For the Love of God(The Diamond Skull)

허조의 형 허주의 졸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세종 22년 12월 9일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허주(許周)가 졸(卒)하였다.”로 시작하며 그의 올곧은 성품이 드러나는 처신과 일에 임하는 자세 등이 소상히 기술되고 있다. 특히 고령에 병으로 사직하여 있을 때 일화는 기품있는 유학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을 보는 듯하다.


"...이에 이르러 병이 더욱 위중하여 낫지 아니하매, 자손들이 약 먹기를 청하자 허주가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의 일은 다 끝났다. 약은 먹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자손들이 억지로 권하니 몇 차례 바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이 급하게 되자 곧 정침(正寢)으로 옮기고, 병을 참고 견디며 일어나 몸소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누워 손을 휘둘러 부녀(婦女)를 물러가게 하고, 그 아들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무릇 상제(喪制)는 힘써 검약(儉約)한 것을 따르라.' 하고, 기타는 말함이 없었다. 마침내 졸(卒)하니, 나이가 82세였다."


언제 죽을지 정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살아가는 가치와 목표에 포함해 놓고 나를 훈련 시키며 살아야겠다.

나의 졸기 쓰기 제안

‘나의 졸기, 당신의 졸기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문득 이런 물음이 스친다. 노인 대상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이 제안되고 실행되면서 ‘자서전 쓰기’ ‘유언장 쓰기’ 등이 주목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파생 상품이 노인복지관이나 중장년층 대상 기관에서 꾸준히 개발되고 운영되기도 한다. 자서전도 좋지만 ‘나의 졸기’ 쓰기를 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환갑 혹은 퇴직 즈음에 나의 졸기를 써본다면 시기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모년 모월 모일 졸하다’로 시작하는 대신 태어난 날로 시작하여 부는 누구이고 모는 누구이며 어디 사람이라는 숙명적 사실을 먼저 기록한다. 그리고 본인 인생의 주요 변곡점들, 이벤트를 순서껏 나열하고 그때 그때 심정이 어땠는지 주변 사정은 어땠는지 생각나는 대로 써본다. 미사여구나 문학적 기술은 들어가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향후 나는 이러이러하리라는 기대 인생을 기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90세, 아니면 100세에 졸한다고 가정하고 앞으로의 인생 업적을 무엇으로 어떻게 이루어 갈지 구체적으로 기획해볼 일이다. 마치 향후 5년간 사업계획서, 또는 신사업 프로젝트를 기획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새로운 내 인생 성과나 특기하고 싶은 일이 일어났다 싶으면 기록을 업데이트한다.


나의 졸기라니 코믹하지 않은가? 살아온 과거의 일을 정리하여 기록하고 향후 나를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영화 시나리오처럼, 드라마 대본처럼 나를 주인공 삼아 창작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듯싶다. 이 또한 세종을 공부하다 스스로 부추겨 든 생각이니 세종은 끊임없이 동기부여하고 일하게 만드는 리더가 분명하다. “세종 5종 신기”처럼 ‘나의 졸기’ 쓰기 교재를 개발한다든지 혹은 그런 교실이나 동아리 모임을 만들어 세종으로 연결되는 관계가 더 새롭게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졸기는 분명, 70대부터는 온통 세종대왕과 관련된 사건들로 채워질 것이다. 성은을 입었으니 그 값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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