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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칼럼 - 세종, 나를 바꾸다 3] 고기연 학회장 - 세종은 혼자 해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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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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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칼럼 - 세종, 나를 바꾸다 3] 고기연 학회장

세종은 혼자 해결하지 않았다


 

국가공무원으로 29년 10개월을 일하면서 문제해결을 고민했다. 얼마 전 만난 대학 후배가 “선배는 재미가 없다”고 한 것도 진지함이 몸에 밴 관료의 한 모습을 본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는다. 1995년 산림청 산불 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해 산림항공본부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2년 일찍 마쳤다. 대학에서 나무와 숲을 전공했고 공직 중 산불 관련 업무만 다섯 차례 맡았으니, 다른 공무원보다 산불재난을 많이 경험한 편이다. 그러나 재난현장을 거듭 경험하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조직·예산·장비를 더 투입해 해결하려는 관료적 문제해결 방식은 오히려 내 안에 더 굳어져 갔다.


그런데 공직 후반으로 갈수록 의문이 생겼다. 대형산불이 발생하면 헬기조종사와 지상진화대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과 싸운다. 큰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대책이 나오고 조직과 예산, 장비도 보강된다. 그런데 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가. 왜 현장의 대원들은 쉽게 진화되지 않는, 이른바 ‘꺼지지 않는 산불’과 다시 맞서야 하는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해 온 행정적 처방만으로 복잡한 재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그동안 업무 현장에서 품어왔던 이런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뜻밖에도 고전에서 찾게 되었다. 2023년 9월 세종국가경영연구원 박현모 원장이 원주 산림항공본부의 내 사무실을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오랫동안 세종을 연구해온 박 원장의 권유로 세종실록 온라인 강독에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낯설었던 고전 읽기에 점차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낮에는 산림항공 업무를 하고 밤에는 관사에서 격주로 실록을 읽었다. 그렇게 4학기에 걸쳐 세종실록을 읽다 보니, 600년 전 세종이 국가의 여러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가는 모습 속에서 내가 공직생활 내내 고민해왔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세종이 주요 문제를 개인의 능력이나 일회성 대응에 맡기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한양 대화재 이후 세종의 문제해결 방식 

대표적인 사례가 세종 8년인 1426년 한양 대화재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지면서 시장 주변과 민가 2천여 호가 불타고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세종은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인 강무를 위해 도성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왕이 없다고 대응이 멈추지는 않았다. 왕비와 도성에 남아 있던 대신·관리들이 종묘와 궁궐을 지키며 화재에 대응했다.

내가 더욱 관심 있게 본 것은 큰불이 난 다음이었다. 세종은 불을 끈 것으로 일을 끝내지 않았다. 방화벽을 만들고 도로를 넓혔으며, 곳곳에 우물을 파 물을 확보하고 진화도구를 비치했다. 각 관청이 화재가 나면 소속 인력을 동원하도록 역할도 정했다. 이어 대신들에게 화재 예방과 진압 방안을 충분히 내도록 한 뒤, 화재 예방을 전담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상설기관으로 설치했다. 쉽게 말하면 당시 한양에 화재 예방과 대응을 맡는 전담 소방기관을 둔 셈이다.

더 나아가 불에 취약한 주거구조마저 바꾸려 했다. 화재 피해자와 가난한 백성에게 기와를 싸게 공급하기 위해 별도의 기와 가마를 설치하고, 승려 가운데 기와 기술자를 선발해 생산체계까지 갖추었다. 이후에는 도성의 초가를 조사해 불에 취약한 초가지붕을 단계적으로 기와지붕으로 바꾸자는 방안까지 논의되었고, 기와 생산과 공급체계도 계속 정비됐다.

나는 이 일련의 기록에서 세종의 문제해결 방식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을 더 동원해 불을 끄는 데서 끝내지 않고, 방화시설·도로·용수·장비·전담조직에서 주거구조마저 손봤다. 문제를 현장 사람들의 헌신에만 맡기지 않고 시스템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오늘날의 산불재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형산불이 발생하면 헬기와 소방차, 진화인력을 신속하게 투입해야 한다. 당장의 불을 끄는 일은 한시도 미룰 수 없는 급무(急務)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산불이 크게 번질 수 있는 숲의 상태는 어떤가. 숲속에는 얼마나 많은 산불 연료가 쌓여 있는가. 산림과 주거지가 맞닿는 곳의 위험은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가. 지역은 평상시에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현장의 조종사와 진화대원들이 반복해서 제기하는 문제는 정책 결정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불이 난 뒤 대응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하는 것과 함께, 불이 커지는 조건을 평상시에 줄여야 한다. 산불이 나기 전에 위험을 줄이는 일이 선무(先務)다. 600년 전 한양 대화재와 오늘날의 산불재난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기술도 사회도 행정체계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한 뒤 대응력을 보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이 커지는 구조적 조건을 찾아 평소에 줄이며 이를 담당할 역할과 조직을 제도화한 문제해결 방식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달라진 점

세종실록을 읽으며 눈에 들어온 또 하나는 소통의 방식이었다.


세종은 경연(經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경연은 신하가 왕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자리로만 머물지 않았다. 세종은 질문했고 신하들은 자신의 의견을 냈다. 생각이 다르면 서로 논박했다.


세종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의논하라 함은 서로 논박하면서[互相論駁]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를 진술하라[各陳所蘊]는 것이다.”


단순히 여러 사람의 의견을 한 번씩 듣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충분히 드러내고 논박하면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더 나은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세종의 강점은 모든 답을 알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질문하고, 듣고, 다른 의견이 충분히 드러나게 하고, 그 과정을 거쳐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세종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접한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누구와도 의견을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소통의 수단이 늘어난 만큼 다른 생각을 더 잘 듣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SNS에서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주장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반면, 다른 의견은 내용을 충분히 듣기도 전에 배척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본다. 조직에서도 최고책임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올라가고 불편한 현장의 목소리가 걸러진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세종은 “내가 깊은 궁궐에 거처한다고 신하들이 내 눈과 귀를 가리고 막으려 하는구나”라며 옹폐(壅蔽)를 경계했다. 정보와 목소리가 중간에서 막히고 가려지면 최고책임자라고 해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경계였다.


세종실록을 읽으며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다른 의견을 만나면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의견 속에 내가 보지 못한 현실이 들어 있지 않은지를 먼저 생각하려 한다. 다름이 곧 틀림은 아니라는 것, 토론이 소모가 아니라 더 나은 답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반복되는 문제를 사람의 헌신에만 맡기지 않고 역할과 제도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세종에게서 배웠다.


2025년 1월 말 공직을 마친 뒤에는 관심 있는 산불재난 문제를 보다 자유롭게 연구하고, 한국산불학회 활동을 통해 정책당국과 전문가, 현장과 민간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연결하려 하고 있다. 공직에 있을 때보다 다른 목소리를 듣고 연결하는 일이 많아졌다.


세종은 주요 문제를 개인의 판단과 일회성 대응에 맡기지 않았다. 사람에게 역할과 책임을 맡기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들으며, 반복되는 문제는 제도와 시스템으로 풀어가려 했다.


빨리 진압하기보다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600년 전 한양의 큰불을 대했던 세종의 모습은 오늘날의 산불재난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큰불이 날 때마다 ‘어떻게 더 빨리 끌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면 ‘왜 이런 큰불이 반복되는가’를 함께 묻고, 현장의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음 불이 오기 전에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있는가.


내가 세종실록이라는 고전에서 찾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후자에 더 가깝다.


글머리에서 소개한 후배의 말이 가끔 떠오른다. 이제는 정답을 혼자 찾기보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다. 세종이 경연에서 보여준 것처럼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러다 언젠가 그 후배에게서 “이제는 좀 달라졌네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세종실록을 읽으며 시작된 나의 작은 변화일 것이다.



글/ 고기연 (한국산불학회 회장, 전 산림항공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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