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세종은 ‘제도명비(制度明備)’를 통해 시스템적 대안을 마련했다.
세종은 일시적인 금지령이나 지도자의 지속적인 감시에 의존하지 않았다. 지도자가 일일이 살피지 않아도 공정하게 작동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법(貢法)이다. 그는 관리의 주관적 재량을 줄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설계했다. 오늘날 세종이 복지와 고용 정책을 이끌었다면, 자원이 불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도록 투명하고 객관적인 수혜 기준부터 마련했을 것이다.
정보의 투명성도 중시했다. 시장의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표준 저울을 만들어 반포했듯이, 오늘날에는 취업 정보와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필요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을 것이다. 정보의 비대칭에서 비롯되는 불신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세종은 사안의 성격에 따라 의사결정과 실행 방식을 달리했다.
세종은 갈등이 첨예한 사안일수록 소통의 방식을 더욱 정교하게 구분했다. 세제 개혁을 추진할 때 약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을 조사한 것처럼,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서는 ‘종다지규(從多之規)’의 원칙에 따라 폭넓게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세종은 “주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이념이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민생에 실제로 이로운가’였다.
충분한 논의를 통해 의심이 해소된 사안에서는 과감하게 결단했다. 청년 일자리 구조 개혁이나 국가의 미래가 걸린 과제처럼 기득권의 반대가 심한 난제라면, “의심이 없는 일은 독단으로 한다”는 신념 아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실행했을 것이다. 폭넓게 듣되 결정할 때는 책임 있게 결단하는 것, 이것이 세종의 책임 정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