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처럼 어렵고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숙주는 어떻게 사피심감(使彼心感), 즉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외교를 펼쳤나?
첫째, 신숙주는 여진 부족들에게 조선의 포용정책을 분명히 알리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여진 부족들에게 조선은 풍속이 다른 여러 종족까지도 한결같이 포용하며, 서로 사로잡은 사람을 돌려주고 지난 원한을 버리면 보호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는 방침을 전했다. 그러나 “만약 (화해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무례하게 항거하면” 이미 군사훈련을 마친 조선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며,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달래서 보살피는 뜻을 보이고[一以示憐撫之意], 다른 한편으로 위협하여 두렵게 하는[一以恐動之]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세조실록 5년 3월 10일).
그는 그들을 타이르거나 위협하는 과정에서 여진어로 글을 지어 조선의 정책을 설명하고, 부족들 사이에 쌓인 오해를 풀도록 했다. “신이 곧 글을 지어 여진 글자로 번역하여 가상합에게 보내어 여러 두목을 타일렀습니다”라는 그의 보고는, 세조의 포용정책과 경고가 현지 언어를 통해 정확히 전달되었음을 잘 보여준다(세조실록 5년 3월 10일). 여진어로 작성된 신숙주의 글은 현지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 듯 하다. 우디캐 부족 마상합이 이를 들고 오지까지 찾아가자, 처음에는 간첩으로 의심받았으나 글을 펼쳐 보이자 곧 무기를 거두고 무릎을 꿇어 조선 국왕의 명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이다(세조실록 5년 4월 13일).
이처럼 포용과 위협을 말과 글로 함께 구사하자, 마침내 “저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使彼心感](세조실록 5년 3월 10일). 여진 부족들은 화해의 자리에서 “상위(上位 : 조선 국왕)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계책은 아비가 자식을 돌보는 것보다도 더하다”고 서로 말하며, 신숙주의 화해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세조실록 5년 3월 10일). 회령진에서 이러한 효과를 확인한 뒤, 신숙주는 온성·경원에 이르러서도 여진 부족들을 타이르는 글을 지어 번역해 각지에 보내는 방식을 이어갔다.
둘째, 명나라의 감시와 경계는 조정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극복해 갔다. 명나라 사신이 예상보다 이르게 한양에 도착하자, 세조는 신숙주를 소환하려던 방침을 바꾸고 그의 현지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다(세조실록 5년 4월 9일). 세조는 명 사신들에게 조선이 야인과 왜인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 현실 - “서북쪽은 야인과 연해 있고, 동남쪽은 왜인과 가깝게 접해 있다”-을 설명하며, 국경에서의 응접은 불가피한 조치였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술자리를 베풀어 긴장을 누그러뜨렸다(세조실록 5년 4월 8일).
아울러 세조는 과거 명 황제들이 여러 차례 여진족을 관용하고 보살피라고 내린 칙유(勅諭)를 근거로, 조선의 포용정책이 황제의 뜻에 어긋나지 않음을 설파했다. 여진 부족에게 벼슬과 양식을 내린 일 역시 오래된 관례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세조실록 5년 4월 16일). 신숙주는 이러한 조정의 기조를 현지에 전달받아, 명 사신들에게 빌미가 될 만한 표현을 철저히 정리했다. ‘왕화(王化)’나 ‘자주 내조(來朝)하라’와 같이 제후국의 위상을 넘는 표현이 담긴 문서는 즉시 환수하여, 조선이 여진족을 초무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조치했다(세조실록 5년 4월 13일).
셋째, 끝까지 화해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로 단호히 대응했다. 여진족 낭발아한(浪孛兒罕)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신숙주가 여진 부족들을 소집했을 때 병을 핑계로 불응했고, 길에서 조선의 통역관을 만났을 때는 조카로 하여금 활을 겨누게 하는 등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보였다. 나아가 신숙주 일행이 여진족을 이간하기 위해 왔다고 단정하며, 조선이 장차 병마를 거느리고 와서 처자까지 해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화해를 방해했다(세조실록 5년 6월 11일).
이에 세조는 신숙주 등이 참석한 사정전 회의에서 낭발아한 부자를 처형하기로 결정했고(세조실록 5년 8월 28일),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에게 회령부에 구속된 이들을 참형에 처하도록 명했다(세조실록 5년 6월 11일). 이는 조선 사신을 위협하고 화해를 저해할 경우, 반드시 강제력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한 조치였다. 곧 내수외교란 관대함에만 기댄 정책이 아니라, 은혜와 위협을 함께 갖춘 질서 구축의 외교였음을 여진 부족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