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헤어진 신숙주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 다시 황찬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달라져 있었다. 황찬은 이 두 번째 만남을 회고하며, ‘서로 돕고 의지함이 더욱 간절해졌으며, 마침내 그를 일 잘하는 선비[善士]로 여기게 되었다’고 적었다. 처음의 만남이 신숙주를 ‘내공 있는 사람’, 곧 근본과 연원이 분명한 인격자로 알아보는 데 그쳤다면, 재차 이루어진 만남에서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을 보고, 신뢰가 한층 깊어진 것이다. 한글의 음운학적 검증이라는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그의 강한 책임감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은 더 이상 단순한 학자와 사신의 관계에 머물지 않았다. 마침내 서로 절실히 돕는[相資之切] 관계로 나아갔다.
일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신숙주가 자신의 집 당호를 청했다. 황찬은 그에게 “희현당(希賢堂)”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는 송나라의 주돈이가 말한 “선비란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希賢] 존재”라는 뜻으로, 첫 만남에서의 신숙주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신숙주는 명나라 최고의 학자 황찬을 만나 처음에는 ‘내공 있는 인격자’로 마음을 열게 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사명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지적 협조자로 만들었으며, 떠날 즈음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신숙주의 ‘인문외교’, 곧 높은 수준의 지적 교류를 통해 외교적 목표를 달성한 사례는 이때에만 그치지 않았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을 방문해 조선 지식인들의 수준을 가늠하고자 했을 때,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빼어난 시사(詩詞) 구사 능력으로 그를 탄복시켰다. 이는 무력이나 의전이 아니라 학문과 문장으로 상대의 존중을 이끌어낸, 인문외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신숙주 연보(年譜)>에 따르면, 그는 이 무렵 무려 열세 차례나 중국 요동 지역을 왕복하며, 동아시아 음운학 지식의 최전선을 직접 확인하고, 새로 창제된 한글의 음운 체계가 지닌 학문적 타당성과 우수성을 면밀히 검증하는 중대한 사명을 끝내 완수했다. 개인의 학문적 성취를 넘어, 한 시대의 지식 기준을 점검하고 끌어올린 이 여정은, 인재를 알아보고 과감히 맡긴 세종의 통찰과 함께 조선 지성사의 특기할 만한 명장면이라 하겠다.
이제 둘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신숙주가 자라고 성장한 집현전은 과연 어떤 분위기였을까. 그는 스물다섯 살에 주자소 별좌와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의 신숙주는 이른바 ‘신숙주 숙직사건’ 일화에서 보듯이, 연구와 업무에 거의 몰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며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 시기 신숙주는 집현전의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따라 경전[經]과 역사[史]를 고루 익히며, 국가 경영에 필요한 강독과 글쓰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흔히 말하는 ‘집현전 커리큘럼’이란, 모든 학사들이 경전·역사·자서·시문집[經史子集] 가운데 자신이 강독한 분량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가 매달 말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촘촘하고도 엄격한 학습 제도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