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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7호] 신숙주의 내수(內修) 외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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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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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내수(內修) 외교론 :

안이 바로 서야 밖이 따른다

 
지난 글(「세종이야기」 제16호)에서 살폈듯이, 신숙주는 한어·왜어·몽골어·여진어에 두루 통했을 뿐 아니라, 문장과 실무를 함께 갖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보다 세 살 아래로 집현전 생활을 함께한 서거정은 신숙주를 가리켜 “문장도 잘짓고 실무에도 뛰어난 인재”라고 평가했다. 서거정의 말에 따르면, 문장에 능한 이는[長於文章] 대체로 실무에 약하고, 실무에 능한 이는[優於政事] 문장을 잘 짓지 못해 이 두 영역을 아울러 갖추기란 쉽지 않은데, 신숙주만은 예외적으로 이 두 가지에 모두 탁월하여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서거정전집》, 문집 권5).

신숙주, 파직의 시간에 언어와 문장을 벼리다

흥미롭게도 신숙주가 이처럼 뛰어난 어학 능력과 문장력을 갖추게 된 배경에, 젊은 시절의 파직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스물세 살에 문과에 급제해 전농직장(典農直長)을 첫 관직으로 제수받았다. 그러나 담당 관리가 착오로 임명 문서[牒 첩]를 전달하지 않는 바람에, 임명 사실을 알지 못한 신숙주는 출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신숙주 졸기>에 따르면, 신숙주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연로한 해당 관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관리가 이미 공문서를 보냈는데, 나의 잘못으로 결근했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약 2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바로 이 시기가 어학 공부를 비롯한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간이었다(강신항, 「신숙주와 운서」, 2002, 48쪽).
 
신숙주의 독서 범위는 실로 대단히 넓었다. 집현전 학사를 지낸 이승소에 따르면, 신숙주는 “천하의 서책 가운데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쌓은 바가 깊었기 때문에, 한 번 글로 옮기면 시와 문장이 되어 바닷물이 넘실거리듯 크고 분방하면서도, 속된 문장을 짓지 않았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은 그의 글을 “서로 전하여 글쓰기의 표준[程式]으로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이승소, 「보한재집」권17, 비명)바로 이러한 실력가였기에, 세종은 신숙주를 압록강 너머 요동까지 보내, 중국의 운서(韻書)에 관해 직접 자문하도록 맡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이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고 돌아왔을까. 더 나아가, 그가 성장의 토양으로 삼았던 집현전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숙주가 찾아갔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글 속에 있다.
 
황찬은 1445년(세종 27년) 4월, 신숙주에게 써 준 글에서 첫 만남의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신숙주를 대면했을 때 ‘그의 용모는 매우 단아하고 의젓했으며[端重], 말과 행동 또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숙주를 두고 틀림없이 “축적된 내공을 지닌 인물[有源委者]”일 것이라 여겼다. 며칠을 함께 지내는 동안 비로소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는데, 그가 보기에 신숙주는 “진실로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선비[希賢之士]”였다. 다만 사행의 일정상 신숙주 일행은 오래 머물 수 없었고, 이내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에서 인격을 보고, 두 번째 만남은 사명을 보았다

이렇게 헤어진 신숙주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 다시 황찬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달라져 있었다. 황찬은 이 두 번째 만남을 회고하며, ‘서로 돕고 의지함이 더욱 간절해졌으며, 마침내 그를 일 잘하는 선비[善士]로 여기게 되었다’고 적었다. 처음의 만남이 신숙주를 ‘내공 있는 사람’, 곧 근본과 연원이 분명한 인격자로 알아보는 데 그쳤다면, 재차 이루어진 만남에서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을 보고, 신뢰가 한층 깊어진 것이다. 한글의 음운학적 검증이라는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그의 강한 책임감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은 더 이상 단순한 학자와 사신의 관계에 머물지 않았다. 마침내 서로 절실히 돕는[相資之切] 관계로 나아갔다.
 
일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신숙주가 자신의 집 당호를 청했다. 황찬은 그에게 “희현당(希賢堂)”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는 송나라의 주돈이가 말한 “선비란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希賢] 존재”라는 뜻으로, 첫 만남에서의 신숙주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신숙주는 명나라 최고의 학자 황찬을 만나 처음에는 ‘내공 있는 인격자’로 마음을 열게 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사명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지적 협조자로 만들었으며, 떠날 즈음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신숙주의 ‘인문외교’, 곧 높은 수준의 지적 교류를 통해 외교적 목표를 달성한 사례는 이때에만 그치지 않았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을 방문해 조선 지식인들의 수준을 가늠하고자 했을 때,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빼어난 시사(詩詞) 구사 능력으로 그를 탄복시켰다. 이는 무력이나 의전이 아니라 학문과 문장으로 상대의 존중을 이끌어낸, 인문외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신숙주 연보(年譜)>에 따르면, 그는 이 무렵 무려 열세 차례나 중국 요동 지역을 왕복하며, 동아시아 음운학 지식의 최전선을 직접 확인하고, 새로 창제된 한글의 음운 체계가 지닌 학문적 타당성과 우수성을 면밀히 검증하는 중대한 사명을 끝내 완수했다. 개인의 학문적 성취를 넘어, 한 시대의 지식 기준을 점검하고 끌어올린 이 여정은, 인재를 알아보고 과감히 맡긴 세종의 통찰과 함께 조선 지성사의 특기할 만한 명장면이라 하겠다.
 
이제 둘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신숙주가 자라고 성장한 집현전은 과연 어떤 분위기였을까. 그는 스물다섯 살에 주자소 별좌와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의 신숙주는 이른바 ‘신숙주 숙직사건’ 일화에서 보듯이, 연구와 업무에 거의 몰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며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 시기 신숙주는 집현전의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따라 경전[經]과 역사[史]를 고루 익히며, 국가 경영에 필요한 강독과 글쓰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흔히 말하는 ‘집현전 커리큘럼’이란, 모든 학사들이 경전·역사·자서·시문집[經史子集] 가운데 자신이 강독한 분량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가 매달 말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촘촘하고도 엄격한 학습 제도를 가리킨다.

집현전이라는 고강도 학습 공동체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들은 열흘에 한 차례, 곧 한 달에 세 번씩 시와 문(詩·文)의 글제를 받아 시험을 치렀고, 그중 “일등으로 입격한 시와 문을 가려 월말에 모두 등사하여 임금께 올리는” 절차를 거쳤다(세종실록 16년 3월 17일). 학문적 성취가 곧바로 군주 앞에서 평가받는 구조였던 셈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신숙주는 성삼문 등 동료 학사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학문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개인의 재능에만 기대는 공부가 아니라, 제도적 긴장과 동료 간 경쟁이 결합된 집현전의 학문 풍토가 그의 성장을 촉진한 것이다(민현구, 「신숙주와 집현전 학자들」 2002, 82-83쪽).

 
이러한 학문적 수련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신숙주의 조직경험과 외교 활동이다. 신숙주는 스물다섯 살에서 쉰아홉 살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집현전 학사(세종 시대), 사헌부 관리(문종 시대), 승정원 승지(단종 시대), 의정부 재상(세조 시대) 등 조선 조정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대표적인 학자 관료였다. 특히 아홉 달에 이르는 일본 사행과, 결코 녹록지 않았던 여진 부족과의 화해 및 정벌 경험은 조선 초기는 물론 후기를 통틀어 보아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이력이다.
 
신숙주의 외교가 특별히 주목되는 이유는, 그가 이예(李藝, 1373∼1445)와 더불어 15세기 조선 외교를 이끈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특히 복잡하고 위험한 일본과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다루었던 외교관이었는데, 생몰 연대로 보자면 이예가 15세기 전반부를, 신숙주가 그 후반부를 대표한다. 이예가 1400년부터 1443년까지 무려 마흔 차례가 넘도록 거의 해마다 한 번씩 현해탄을 건너며 667명의 포로를 송환해 온 것처럼(세종실록 27년 2월 23일, 이예 졸기), 신숙주 역시 외교의 최전선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예와 신숙주, 15세기 외교의 두 축

<신숙주 연보>에 따르면, 그는 1443년 통신사 서장관으로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왔고, 1445년에는 운서(韻書) 자문을 위해 중국 요동을 여러 차례 왕복했다. 이어 1452년에는 명나라에, 1460년에는 여진족 토벌군 사령관으로 만주에 나아갔다. 일본과 명나라, 여진 지역을 오가며 외교와 군사라는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1443년 일본 사행에는 이예 역시 체찰사로 동행했는데(세종실록 25/10/13), 이는 조선 조정이 일본 외교를 얼마나 중대하게 인식했고, 또 그 임무를 맡길 인재로 두 사람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숙주의 외교 활동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뚜렷이 나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까지는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학문과 외교를 결합한 임무를 수행했고, 40대 중반 이후에는 두만강 변 여진 지역에서 보다 거칠고 복합적인 외교 현안에 대응했다. 전반기에는 문(文)으로 신뢰를 열었고, 후반기에는 정치와 군사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일본과 요동 사행에서는 즉석 시문과 음운학적 식견으로 상대의 존중을 끌어냈고, 그 결과 맡겨진 임무 또한 소기의 성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저술 『해동제국기』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일본을 비롯해 그가 직접 다니며 파악한 주변국의 지리 정보와 외교 방향, 그리고 세종 시대 대외정책의 기조가 담겨 있다. 특히 서문에서 강조된 것은 외형적 과시가 아니라 내수(內修)였다. “교린의 방도는 겉모양을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안을 잘 정돈하는 데 있으며, 변방 방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정(朝廷)을 잘 이끄는 데 있다”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외교의 출발점은 내수(內修)에 있다

 

내수, 즉 안을 잘 정돈하고 조정을 잘 통솔하는 데서 외교 능력이 생긴다는 신숙주의 말은 사실 외교협상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뛰어난 외교관이란 자국이 지닌 국력의 여러 요소 가운데 사용 가능한 자원을 조화시키는데에 능한 사람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추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정부의 질”이다. 특정 외교정책에 대한 초당적(超黨的) 협력과 함께 국민 다수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뒷받침 될 때 외교 협상은 국익이라는 성과로 마침내 이어질 수 있다는 건 고금동서의 통설이다.
 
신숙주가 이 책에서 중국의 순임금에게 신하 익(益)이 올렸다는 ‘익의 경계[益之戒]’를 상기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도를 지키고, 사사로운 욕심을 경계하며, 어진 이를 믿고 쓰는 통치자의 자기 절제가 결국 사방의 귀의(歸依)를 부른다는 게 그 요지다. 여기서 보듯, 한 나라의 외교는 국경 밖의 상황보다 통치 내부의 성숙도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다면 신숙주의 외교 사상, 특히 ‘내수(內修)론’은 일본과 여진 등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그리고 이 사상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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