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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6호] 신숙주, 한글을 시험하러 압록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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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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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한글을 시험하러 압록강을 건너다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했다.”
이 한 줄이 《세종실록》 27년 1월 7일에 실려 있다. 짧은 기록이지만,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세종은 한글이 창제된 지 2년째이던 1445년, 이 일을 위해 집현전의 신숙주와 성균관의 성삼문, 그리고 무관 손수산을 압록강 너머 요동으로 보냈다. 그런데 요동은 어디이며, 운서는 어떤 책일까. 그리고 왜 하필 신숙주와 성삼문이었을까.
 
손수산은 조선의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한 하급 관리로, 이번 사행에서 호송과 경호를 맡았던 인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여정의 학문적 핵심은 신숙주와 성삼문에게 맡겨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무엇을 묻고, 무엇을 확인하며, 무엇을 가지고 돌아오려 했던 것일까.

신숙주, 압록강을 건너다

우선, 요동은 중국 요하(遼河)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 랴오닝성(遼寧省) 동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수양제와 당태종 같은 중국 황제들이 ‘요동 회복’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입하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마침 그 요동에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유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종은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보내 운서(韻書)에 관해 자문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운서란 어떤 책일까. 한자사전은 대체로 훈고(訓誥)·자서(字書)·운서(韻書)의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운서는 한자를 그 운(韻)에 따라 분류하고 주석한, 발음 중심의 자전이다. 세종은 이보다 1년여 앞선 1444년(재위 26년) 2월, 『운회(韻會)』, 곧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신숙주 등에게 번역하게 한 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세종이 중국어 표기를 정확히 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자 발음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을 것이다.
 
학습 과정에서 한글이 지닌 경쟁력은 최만리가 “만일 한글을 배우게 되면 아무도 고심노사(苦心勞思)하여 한문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한 대목에서 오히려 분명히 드러난다(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이는 오늘날 영어 알파벳을 배울 때 쉬운 한글 표기를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익히기 어려운 다른 언어 체계를 거쳐 배울 것인지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영어 알파벳을 거쳐서 중국어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이 그것이다. 요컨대 『운회』의 한글 번역은 지식을 익히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부터 학습 환경을 바꾸어 놓는, 혁명적인 시도였다. 그만큼 운서의 중요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세종이었기에, 한자의 보다 정확한 발음[語音]과 뜻풀이[字訓]를 확인하기 위해 신숙주 등을 요동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처럼 정확한 언어 사용과 음운학을 중시했을까. 그 일차적인 이유는 외교적 필요에 있었다. 태조 시기 명나라와의 관계를 크게 뒤흔들었던 이른바 ‘표전문 사건’, 곧 외교 문서의 문구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빚어진 갈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나라 조정이 실제로 사용하는 중국어 발음과 문장 표현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더구나 조선의 사신이나 통역관이 황제 앞에서 표준어가 아닌 변방의 사투리를 사용해 모욕을 당하는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외교 언어가 국격을 좌우한다

그러한 경계심은 고려 말 이색의 일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1388년(고려 우왕 14년), 문하시중 이색이 명나라와의 외교를 위해 수도 남경(南京)을 찾았을 때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이색의 중국어 발음을 듣고 “그대의 중국말이 꼭 북원(北元)의 장수 나하추 같다”고 비웃었다. 이는 고려 사신단을 압박하려는 외교 전술이었지만, 동시에 외교 현장에서 표준어 구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면, 한미 정상회담장에서 미국 대통령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이 제주도 사투리로 옮기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은 문장력을 가늠하는 첫 관문인 시부(詩賦) 진사시험에서 장원에 오른 인물이자(1438년, 세종 20), “한어·왜어·몽골어·여진어에 두루 통하여 때로는 역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하는” 신숙주를 선택해(강희맹, 「문충공행장」, 『보한재집』 권17 부록) 요동으로 보냈다. 실제로 신숙주는 훗날 세조 때, 협상 자리에서 직접 여진어로 글을 지어 조선의 뜻을 전하고, 여진 부족들 사이의 오해를 풀어내기도 했다(세조실록 5년 3월 10일). 더구나 그는 그보다 한 해 앞선 1443년(세종 25)에 이미 일본 사행을 통해 외교 감각까지 검증받은 상태였다.

신숙주, 한글의 과학성을 요동에서 검증받다

또 다른 이유는 훈민정음 창제와의 관련성에서 찾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제자해(制字解)’에 보이듯, 인간의 음성 구조와 그로부터 나오는 성음(聲音)의 원리를 끝까지 탐구한 결과로 만들어진 문자였다[因其聲音而極其理]. 이를 위해서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몽골어, 범어에 이르기까지 여러 언어를 두루 계고(稽考), 곧 기존의 자료를 면밀히 상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더 나아가 세종은 음운학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 속에서 지식인들을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최만리와의 논쟁에서 세종이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세종실록 26년 2월 20일)라고 따져 물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8학사의 핵심 인물이자, 한글 창제 이후 첫 사업인 『운회』 번역에 참여했던 신숙주가 요동으로 파견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대표적 음운학자 황찬과 교류하며, 훈민정음의 원리, 곧 자음과 모음의 합자(合字)와 용자(用字) 방식을 놓고 무려 열세 차례나 설명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신숙주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 사전인 『동국정운』 편찬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았던 신숙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숙주는 세종 시대 인물 중에서 황희 정승과 더불어 가장 많은 일화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신숙주 숙직 사건’이다. 집현전 학사로 밤샘 작업을 하다 세종에게 용포를 하사받았다는 이야기다. 또 스무 살 무렵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사람들을 감탄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6진의 지리와 지형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진법을 함께 문서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때 김종서는 “내 문장도 내가 실로 자부하는 바이지만, 그대의 글재주 또한 쉽게 얻기 어려운 문장”이라며 신숙주의 필력을 칭찬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고사본말). 임종을 앞두고는 ‘뒷날의 일’을 묻는 성종에게 “일본과 잘 지낼 것”을 당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중종실록 7년 윤5월 21일). 이러한 여러 에피소드는 신숙주가 단지 학자에 그치지 않고, 외교와 군사, 문장과 실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숙주에 대한 엇갈린 평가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상당하다. 단종 대신 수양대군 쪽으로 옮겨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변절자의 이미지, 이른바 ‘훈구파’라는 낙인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흔히 회자되는 ‘숙주나물’ 이야기는 접어 두고, 훈구파(勳舊派)라는 규정만 간략히 살펴보자. ‘훈구’라는 말은 본래 “훈구공신(勳舊功臣)”이나 “훈구대신(勳舊大臣)”처럼, 오랫동안[舊] 임금 곁에서 공로[勳]를 세운 원로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성종 후기 이후 새로 등장한 정치 세력이 스스로를 ‘사림파(士林派)’라 부르면서, 세조 이후의 기성 정치인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훈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홍윤성 같은 인물들이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묶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이들은 대부분 집현전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이었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 이시애의 난(1467년, 세조 13), 여진족 토벌(1460년, 세조 6) 등 굵직한 내우외환을 헤쳐 나가며, 나라와 민생을 위기에서 건져 낸 재상들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에게 ‘기득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매도하고, 자신들만을 ‘도학(道學)을 실천하는 사림’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한명회와 정인지, 신숙주 같은 인물들이 펼쳤던 국가 경영의 방략을 오늘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고 배울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어떻게 문장과 무위, 외교와 행정을 고루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으며, 특히 1445년 요동 파견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 내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그 내막은 다음 호에서 이어서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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