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유는 훈민정음 창제와의 관련성에서 찾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제자해(制字解)’에 보이듯, 인간의 음성 구조와 그로부터 나오는 성음(聲音)의 원리를 끝까지 탐구한 결과로 만들어진 문자였다[因其聲音而極其理]. 이를 위해서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몽골어, 범어에 이르기까지 여러 언어를 두루 계고(稽考), 곧 기존의 자료를 면밀히 상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더 나아가 세종은 음운학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 속에서 지식인들을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최만리와의 논쟁에서 세종이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세종실록 26년 2월 20일)라고 따져 물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8학사의 핵심 인물이자, 한글 창제 이후 첫 사업인 『운회』 번역에 참여했던 신숙주가 요동으로 파견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대표적 음운학자 황찬과 교류하며, 훈민정음의 원리, 곧 자음과 모음의 합자(合字)와 용자(用字) 방식을 놓고 무려 열세 차례나 설명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신숙주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 사전인 『동국정운』 편찬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았던 신숙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숙주는 세종 시대 인물 중에서 황희 정승과 더불어 가장 많은 일화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신숙주 숙직 사건’이다. 집현전 학사로 밤샘 작업을 하다 세종에게 용포를 하사받았다는 이야기다. 또 스무 살 무렵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사람들을 감탄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6진의 지리와 지형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진법을 함께 문서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때 김종서는 “내 문장도 내가 실로 자부하는 바이지만, 그대의 글재주 또한 쉽게 얻기 어려운 문장”이라며 신숙주의 필력을 칭찬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고사본말). 임종을 앞두고는 ‘뒷날의 일’을 묻는 성종에게 “일본과 잘 지낼 것”을 당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중종실록 7년 윤5월 21일). 이러한 여러 에피소드는 신숙주가 단지 학자에 그치지 않고, 외교와 군사, 문장과 실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