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서재 이야기(제5호) ㅣ 세종과 맹상군, 인재의 숨은 재능을 찾아 쓰다 > 칼럼

소식

홈으로 소식 칼럼

세종의 서재 이야기(제5호) ㅣ 세종과 맹상군, 인재의 숨은 재능을 찾아 쓰다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 24-09-23
  • 조회159회
  • 이름관리자

본문

제5호 2024.09.24(화)
57456_2360745_1724651630308314242.jpg


세종과 맹상군, 인재의 숨은 재능을 찾아 쓰다

 

박현모(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저 말을 정말로 세종대왕이 한 게 맞나요?”

어느 날 택배 기사 한 분이 머뭇거리며 제게 물었습니다. 택배함 아래의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잘하는 게 있다[人有一能]”는 세종어록을 가리키면서, 그 말이 무언가 알 수 없는 용기를 준다고 했습니다. 잘 나가던 식당을 코로나19로 문 닫고 택배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전기 지도 전문가 정척을 키운 세종의 강점경영

두 아이의 아빠인 택배 기사에게 용기를 준 그 어록은 <세종실록> 26년 5월 20일 기사에 나옵니다. 재위 26년째인 1444년에 세종은 정척(鄭陟)을 사역원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각자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재능을 살려내면 나라에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격이 제멋대로인데도 부지런함[勤]으로 왕의 신뢰를 받은 자도 있고, 재주와 덕망이 없지만 언행을 조심해서[謹] 일을 이루어낸 사람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정척 역시 자신의 글씨 쓰는 재능을 키워서 외교 문서 짓기와 지도 만드는 일을 뛰어나게 잘했습니다. 그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지도인 <동국지도>와 <양계지도>는 자신의 강점을 더욱 갈고닦은 결과였지요.

 

세종의 강점경영 사례를 읽다보면 중국 전국시대 맹상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세종 때 편찬된 책 <치평요람> 제6권에는 진실로 환대를 받은 인재들이 어떻게 보답하는지 사례가 여럿 실려 있습니다. 맹상군 전문(全文)은 제나라 왕족 전영의 얼자인데 “일과 사물에 통달하고 뜻하는 바가 커서 재산을 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수천 명의 식객으로 늘 북적거렸는데, 어떤 사람은 지혜를 그에게 빌려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재주를 발휘해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지요.

 

예컨대 맹상군이 진나라 왕에게 초빙되어 갔다가 인질로 잡혀 죽을 처지에 놓였을 때, 식객 중 도둑질 잘하는 사람은 진나라 왕의 창고에서 명품 가죽옷을 훔쳐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자에게 주어서 그를 인질에서 풀려나게 했습니다. 추격당하는 맹상군 일행이 함곡관 입구에서 사로잡힐 상황에서는 닭 울음소리 잘 내는 재주로 성문을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치평요람> 6권 149~150쪽).

 

맹상군의 인재쓰기에 대해서 송나라 왕안석은 “맹상군은 닭 소리나 개 짖는 소리 내는 사람의 영웅일 뿐이다. 어찌 인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왕안석, <독맹상군전>). 하지만 <치평요람> 6권에 나오는 '풍훤(馮諼)의 사례'를 보고도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는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의 고사로 유명한 풍훤은 가난해서 자기 한 몸도 건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맹상군에게 사람을 보내 기식(寄食)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습니다. 맹상군은 우선 그가 좋아하는 게 무언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낸 사람은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는듯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맹상군은 다시 “그러면 풍훤이 잘하는 게 무언가”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풍훤을 만나고 온 집사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듯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맹상군은 그래도 뭔가 잘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풍훤을 받아들였습니다.

 

맹상군 가솔들은 풍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허름한 밥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던 풍훤은 기둥에 기대어 칼집을 퉁기면서 “긴 칼자루여 돌아가자꾸나. 밥상에 물고기 한마리가 없구나”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맹상군은 풍훤을 중간수준의 식객으로 끌어올려 물고기 밥상을 주게 했습니다. 그의 집 식객은 세 분류로 나뉘었는데 상객에게는 고기 밥상을, 중객에게는 물고기 밥상을, 그리고 하객에게는 채소 밥상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풍훤의 인내력 테스트를 통과한 맹상군

풍훤은 얼마 지난 뒤에 다시 칼집을 퉁기면서 “긴 칼자루여 돌아가자꾸나. 외출하려 해도 수레가 없구나”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맹상군은 그에게 수레를 주어 타고 다니게 했습니다. 풍훤의 인내력 테스트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다시 칼집을 퉁기면서 “긴 칼자루여 돌아가자꾸나. 가족을 봉양할 돈이 없구나”라고 노래했습니다. 맹상군 가솔들은 불만이 가득 차서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맹상군은 그의 노모에게 음식과 생활용품을 내며 궁핍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치평요람> 6권158~159쪽). 이야기의 반전은 그 다음에 시작됩니다.

 

그 당시 맹상군에게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3천 명이나 되는 식객을 먹여 살리려니 자기에게 제공된 봉읍(封邑)인 설(薛)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백성들에게 대부업(貸付業)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 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정한 기일이 지나도 이자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자를 받으러 간 맹상군의 집사들은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걱정하고 있던 맹상군에게 어떤 식객이 농담삼아 “풍훤에게 돈 받는 일을 시켜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맹상군은 풍훤을 불러 그동안 소홀했음을 사과하고 설 지역에 가서 이자를 받아올 수 있겠는지 물었고, 풍훤은 흔쾌하게 수락했습니다. 풍훤은 수레에 차용증서를 비롯해 필요한 물건을 챙긴 다음 전송차 나온 맹상군에게 '돈을 회수해서 돌아오면서 혹시 구해 올 게 있는지' 물었습니다. 맹상군으로부터 “우리 집에 없는 게 있는지 살펴보고 구해 오십시오”라는 말을 들은 그 길로 설 지역에 도착해 빚을 진 백성들을 한 곳에 소집했습니다. 차용증서를 일일이 대조하고 백성들의 재정 상태를 확인한 그는 빚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의 채용증서를 맹상군의 지시라며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모두들 “맹상군 만세”를 외쳤습니다.

 

꾀 많은 토끼’ 풍환이 파놓은 세 개의 굴

예상 외로 빨리 돌아온 풍훤에게 맹상군은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밀린 이자는 모두 거두었습니까?” “예”라고 대답하면서 풍훤은 맹상군 집에 없는 것까지 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주군의 집에는 진귀한 보물도 있고, 개와 말, 미녀가 가득한데 한 가지 부족한 게 의로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물로 의로움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의아해하는 맹상군에게 풍훤이 계속 말했습니다. “설 지역은 그 지역 백성들을 보살피라고 왕이 내려준 봉읍입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그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개 장사치처럼 이자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군의 명령'이라고 일컫고 너무 가난해서 이자 낼 돈도 없는 백성들의 채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은혜를 대신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주군께 감사했습니다. 제가 주군을 위해 외로움을 샀다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맹상군은 떨떠름하게 “잘 알겠다”며 물러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습니다.

 

일 년 뒤에 제나라 국왕은 주변국의 압력을 받아 맹상군을 재상직에서 해임했습니다. 그의 봉읍인 설 지역에 가서 살게 하였습니다. 맹상군이 해임되자 그 많은 식객들도 모두 떠나갔습니다. 단지 풍훤만이 그의 곁에 남았습니다. 쓸쓸하게 맹상군이 봉읍으로 퇴거하는 날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설 땅의 백성들이 노인과 아이들까지 모두 나와 하루종일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대가 내게 준 의로움이라는 선물을 오늘 비로소 깨달았소”라고 말하는 맹상군에게 풍훤이 대답했습니다. “꾀 많은 토끼는 늘 세 개의 굴을 파놓습니다[狡兎三窟]. 주군께서는 이제 겨우 굴 하나를 마련하셨습니다. 나머지 두 개의 굴도 선물하고 싶습니다.”(<치평요람> 6권 159~161쪽).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주소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대왕로 72
원장 : 박현모
이메일 : ifsejong12@naver.com

Copyright ⓒ 세종국가경영연구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