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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서재 이야기(제4호) ㅣ 헝클어진 실타래 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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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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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호 2024.09.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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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진 실타래 풀듯이

박현모(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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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은 셉니다.

국역본으로 54권이나 되는 <치평요람>을 손에서 놓치 못하는 이유는 ‘배울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교훈은 사서삼경에도 차고 넘칩니다.

 

<치평요람>을 읽을 때면 철 지난 바닷가를 걷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한여름의 더위와 태풍을 버텨낸 소나무숲과, 쓸쓸한 백사장의 풍경, 그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역사 속 숱한 인물과 사건, 그리고 지금도 비슷하게 생겨나고 있는 문제들을 대하는 듯합니다.

 

바닷가를 거닐 때면 꼭 돌아보는 곳이 있습니다. 동글동글한 몽돌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긴 세월을 이겨낸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한나라 발해 태수 공수의 문제해결 방법

<국역 치평요람> 11권은 한나라 선제(한선제) 때의 뛰어난 관리 공수(龔遂)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한선제는 기근이 오래되어 폭동이 일어나 무정부상태에 놓인 발해(渤海: 여기의 발해는 지금의 산둥반도 위쪽의 발해판 인근 해안지역으로 추정되는 곳) 지역 태수로 공수를 임명합니다.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공수는 황제에게 발해 난민을 어떻게 다스리길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강제 진압이 아니라 포용하길 원한다는 대답을 들은 그는 ‘혼란에 빠진 백성들은[亂民·난민]은 헝클어진 실을 풀듯이[如治亂繩·여치란승] 천천히 순리대로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서 반란을 다스리는 법조문에 구애되지 말고[無拘以法·무구이법], 현지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하라고[便宜從事·편의종사] 재량권을 주었습니다.

 

현지에 내려간 공수가 한 일은 네 가지입니다. 그는 맨 먼저 마중하러 온 경호부대를 물리치고, 휘하 관리(현령)들에게 난민 포위를 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다음으로 그는 백성들에게는 우선 “농기구를 손에 쥔 사람은 농사꾼이니 모두 양민으로 간주하고, 무기 가진 자는 도적으로 간주하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셋째로, 나라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성실한 아전들을 뽑아 자신을 돕게 하되 자애로움으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백성들에게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닭과 송아지를 기르게 했습니다. 간혹 아직도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웃으며 “어찌하여 송아지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가?”라며, 무기를 팔아 농기구를 사게 했습니다.

 

공수가 한 말과 일을 읽다 보면, 어떻게 난제(難題)를 풀어가야 하는지가 보입니다. ‘헝클어진 실타래 풀듯이’라는 뜻의 ‘여치란승(如治亂繩)’에서 중요한 글자는 ‘繩(승)’입니다.

 

승은 실[糹·멱] 같은 것을 여러 개 꼬아서[黽·힘쓸 민] 만든 질긴 노끈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만든 줄로 제 몸을 스스로 묶는다는 ‘자승자박(自繩自縛)’에서 보듯이 어지간해서는 끊어지지 않는 강하고 질긴 동아줄이 어지럽게 얽혀서[亂·난] 풀리지 않는 모습이 ‘난승(亂繩)’이지요.

 

공수가 임명되어 내려간 발해지역이 바로 난승 상황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어 민생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혹독하게 세금을 거뒀습니다. 근무평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였지요.

 

세금을 못 내는 백성들을 가두고 처벌하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관리들은 황제에게 ‘군대로 난민(亂民)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마디로 경제(민생)문제와 법 집행의 공정성 문제, 그리고 백성과 관리들 사이의 극심한 불신이라는 질긴 노끈이 어지럽게 얽혀서 좀처럼 해법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수가 현지에 내려가서 맨 처음 한 일은 소통을 통한 백성들의 신뢰 쌓기였습니다. 먼저 그는 난민 포위를 풀고, 무기 소유자만 처벌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말의 소통).

 

다음으로 조정 정책을 백성들로 하여금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하급 관리, 즉 아전들을 잘 뽑아서 포용정책을 피부로 느끼게 했습니다(인재 소통). 그렇게 하니 비로소 백성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서》의 〈순리(循吏)열전〉을 보면, 공수의 이런 조치의 결과 난민과 도적떼들이 모두 사라졌고, 몇 년 뒤 그가 중앙 조정으로 올라갈 때쯤에는 발해 지역 사람들이 모두 부유하고 튼실해졌다고 합니다.(<치평요람>11권 9-11쪽).


조선 태종의 민생문제 해결방식, '여치난승?'

세종의 아버지 태종 역시 이 이야기에 주목했습니다. 재위 15년째인 1415년 음력 7월 가뭄이 심해지자 그는 “백성 다스리기를 헝클어진 노끈 다스리듯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과인의 뜻을 몸 받아서 새 법을 (급급히) 세우지 말고[毋立新法·무립신법], 다만 차분한 방법으로 일을 다스리라[靜以治之·정이치지]고 말했습니다(태종실록 15/7/6). 가뭄 대책이랍시고 이것저것 새로운 정책을 급조하고 법조문만 잔뜩 만들어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이야기였지요.

 

추석입니다. 헝클어진 문제가 있다면, 역사 속 이야기를 나누며 실타래 풀듯이

술술 풀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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