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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서재 이야기(제 2호) l 리더십 승계, 강명한 한무제도 통탄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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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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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2024.09.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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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세종의 서재 이야기  

<치평요람(治平要覽)>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함께 대표적인 ‘세종의 책’입니다. 이 책은 세종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편찬 방향과 책 이름까지 왕명으로 정해진 ‘세종의 서재 으뜸 문헌’입니다. 1441년(세종 23) 6월 정인지는 “후세 자손의 영원한 거울[後世子孫之永鑑·후세자손지영감]”을 만들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약 4년간(46개월) 작업을 진행하여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15세기 최고의 인재인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리더십 이야기를 통해 '적실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높이시길 바랍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02년에 편찬한 <국역 치평요람>을 사용합니다. - 편집자 주

리더십 승계, 강명한 한무제도 통탄한 까닭

박현모(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역사를 읽으면 어떤 이로움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 읽은 <치평요람> 제10권에 실린 한무제의 비극적인 [戾:어그러질 여] 태자 유거(劉據)의 이야기는 역사를 왜 공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리더의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간신에게 뒤통수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한무제는 29세의 늦은 나이에 황후가 낳은 유거를 몹시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왕위를 잘못 물려주어 실패한 진시황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대장군 위청에게 세자 보호를 당부했습니다. 수문지주(守文之主), 즉 무공(武功)을 세우는 군주가 아니라 문덕(文德)으로 창업의 정신을 지키고 이루어나가는 수성(守成)의 임금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태종이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하면서 기대한 점이기도 합니다. 

진시황의 전철(前轍)을 피하려 했으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자 유거는 아버지 한무제의 부족한 점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사방 오랑캐 정벌하는 일의 위험성을 간언했습니다. 그러면 한무제는 "내가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태자에게 편안한 세상을 물려주면 그 또한 좋지 않겠느냐"며 웃곤 했습니다.  이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황제가 지방 행차를 떠날 때마다 뒷일을 태자에게 부탁하고, 황후에게 궁궐 내부 일을 일임했습니다. 태자는 맡겨진 일을 결재하고 부왕이 돌아오면 그 중 중요한 것만 아뢰었는데, 한무제는 그대로 추인하여 태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한무제는 법 적용이 엄격했으나 태자는 백성들에게 관대하고 온후하였습니다. 관리들이 내린 평결을 뒤집곤 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으나 관리들은 싫어했습니다. 그런 태자를 황후는 우려했습니다. 황제의 눈에 날까 염려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처리하고 죄인을 바로 풀어주지는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한무제는 태자가 옳고 황후가 그르다고  하여 태자를 지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보정대신(輔政大臣) 위청이 죽은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태자와 황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황후를 배알하고 나오면 '태자가 궁인들과 놀다가 밤늦게 나왔다'고 황제에게 거짓으로 일러바쳤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예쁜 후궁들을 뽑아서 태자궁에 보내주었습니다.  뒤늦게 전말을 안 황후가 이간질한 자를 죽여야 한다고 태자에게 말했지만 태자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그만이고, 황제께서 총명하시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하지만 소인배들의 간교한 모함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무제가 병들어서 태자를 불러오라고 했는데 태자궁에 다녀온 간신 상융이 말했습니다. 황상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태자 얼굴에 기쁜 기색이 있었다라고. 황제는 잠시 후에 도착한 태자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태자는 일부러 밝은 얼굴로 대답했으나 눈물 흘린 자국이 있었습니다. 한무제는 비로소 사정을 알고 상융을 죽였습니다.(치평요람 10권 80~81쪽)

하지만 그런 한무제도 '무고(巫蠱)의 화'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무고란 짚과 나무로 만든 인형 등에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놓고 바늘로 찌르는 따위의 주술을 뜻합니다. 태자와 원한 관계에 있던 간신 강충은 궁궐 여기저기에 황제 저주 무고를 파묻은 다음 황제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역사드라마에서 자주 보았던 이 장면은 물론 태자와 황제를 이간질하기 위한 음모였지요. 

태자가 황제가 있는 궁으로 가서 사실을 밝히려는데 강충이 중간에 막아섰고, 그런 강충을 죽이는 과정에서 군졸까지 동원하면서 반란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이 점점 꼬이면서 태자가 황제명령을 사칭하여 동원한 군대와 승상 유굴리가 이끄는 군대가 충돌하여 5일 동안 전투를 벌였고 수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결국 패배한 태자는 관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뒤늦게 무고를 밀고한 자를 조사하고, 강충의 모함과 변란의 전말을 파악해, 연루된 간신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조치였지요. 아들을 그리워한다는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여태자(戾太子)'라는 시호를 올리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는 뜻의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지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지요. 귀래망사지대는 조선 후기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고 후회한다면서 인용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한무제가 놓친 두 번의 기회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듯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맹목적인 인물들의 운명을 보는 이 역사 사실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 한무제처럼 강명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토록 아들을 믿고 지지하는데도 궁궐에서는 이간질이 생기고 비극이 일어납니다. 궁궐로 상징되는 정치세계에서 왜곡 없는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요? 기록된 역사를 나중에 읽는 것처럼, 드라마를 보는 보는 것처럼 제3자적 관점에서 상황을 조망하는 인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세종이 백성들을 찾아가서 실상을 듣고, 주위의 신하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연구하는 이유는 바로 맹목을 벗어나 제3자적 관점에 다가가려는 몸부림이었지요.

둘째는 '무고의 화'가 발생하게 만든 한무제의 잘못입니다. 한무제는 말년에 심기가 약해져서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와 무당을 가까이 했습니다. 태자 유거의 사건도 한무제가 낮잠을 자다가 '나무 인형 수 천 개가 몽둥이로 자신을 치려하는 꿈'을 꾸고는 그것을 해몽하면서 발단되었습니다. 진덕수가 지적했듯이 '한무제 스스로가 방사와 무당의 말에 빠져들어서 정신과 뜻이 혼란스러워진 게' 무고의 화를 낳게 된 궁극의 원인이었지요.(진덕수, <대학연의> 22권).

그런 상태의 황제였기에 태자를 살릴 수 있는 두 차례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만약 강충이 일러바쳤을 때 사실 관계를 명확히 조사해서 밝혔더라면... 나중에 조사해서 밝힌 것처럼... 무고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로 끝났을 것입니다(첫번째 실기). 태자가 전투에 지고 관군들에게 포위되어 있을 때 군대를 풀고 태자를 만나보라고 상소가 올라왔었지요. 그때 황제는 깨달은 바가 있었지만 태자를 사면한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결국 파국을 맞이 했습니다(두번째 실기).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의(時宜), 즉 마땅한 때를 살펴 결정하는 일입니다. 때의 마땅함을 헤아리기 위해서 리더는 마음가짐을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한무제는 그렇지 않았고, 그의 전위(傳位) 계획은 무참히 어그러지고 [戾:어그러질 여]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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