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07호)ㅣ정약용의 함봉련 사건과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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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함봉련 사건과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
박 형 (다사리교육연구소 소장)
다산 정약용의 글 중에, ‘시비이해(是非利害)의 저울(衡)’이라는 것이 있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저울이오, 다른 하나는 이해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종류의 등급이 생긴다. 옳은 것을 지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 해를 받는 것이오, 그 다음은 그른 것을 쫓았는데 이익을 얻는 것이오, 가장 낮은 등급은 그른 것을 쫓아 해를 받는 것이다.”(<여유당전서> 문집 권21 서)
정약용은 이 짧은 글을 통해 정의 사회의 개념을 규정했다. 정의 사회란 옳은 것을 지키면 이익을 얻고 그른 것을 쫓으면 해를 받는 사회이다. 반면에 불의 사회는 옳은 것을 지켰는데도 해를 받고, 그른 것을 쫓았는데도 이익을 얻는 사회이다.
정의 사회를 실현가기 위해서는, 옳은 것을 지켰는데 해를 받는 자가 없어야 하겠지만, 설사 있더라도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른 것을 쫓았는데도 이익을 얻는 자가 없어야겠지만, 설사 있더라도 위선적 가해자를 찾아 벌을 주어야 한다.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함축적으로 시사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정약용의 <흠흠신서>에 나오는‘함봉련 사건’이다.
정조 23년 4월, 정조는 정약용을 형조참의로 임명하고 이미 확정 판결된 건을 포함해 전국의 형사 사건을 모두 재조사하라고 명령한다. 특히, 정조가 직접 ‘함봉련 사건’에 의문의 꼬투리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라 일렀는데,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평창 관아의 하급 관리인 모갑이라는 사람이 세금을 독촉하러 김태명의 집에 갔다가 결국 쌀 대신 송아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아니, 이 도둑보다 더한 관리 놈아! 그 송아지가 어떤 건 줄 알고 훔쳐 가는 게냐?” 김태명은 모갑의 가슴을 무릎으로 짓찧은 후 송아지를 빼앗아 집으로 돌아갔고, 분이 덜 풀린 그는 머슴 함봉련에게 모갑을 더 혼내주라 일렀다. 함봉련은 주인의 명대로 모갑의 등을 살짝 떠밀었고, 잠깐 넘어진 모갑은 곧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모갑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어버린 것이다. 시체 검험 결과 가슴 한 곳이 검붉고 딱딱하며, 코와 입이 피로 막힌 것 외엔 별다른 증상이 없어 타 질병이 아닌 맞아 죽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또 여기서 희한한 것이 주범이 머슴 함봉련, 이를 목격한 증인으로 주인 김태명이 지목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최한나2018. <한나의 역사 스캔들>, 베가북스)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에는, 법률과 형벌에 의한 제도적 방법이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것이 공정한 시민의식에 의한 문화적 방법이다. 율곡 이이 선생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강(정의)은 법령 형벌로 확립할 수 없는 것으로, 조정(시민)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공정하게 되고, 사정(개인의 사사로운 정)이 행해지지(개입하지) 않아야만 기강(정의)이 서는 것인데,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정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서겠습니까?”(선조실록 6년 10월 12일)
정조와 정약용은 법률과 형벌에 의한 제도적 방법으로, 옳은 것을 지켰는데 해를 받은 억울한 피해자인 함봉련을 구제했다. 그리고 그른 것을 쫓았는데 이익을 얻은 위선적 가해자인 김태명을 처벌했다.
정약용은 모갑의 멍 자국은 가슴에 있으며, 이 부위는 김태명이 무릎으로 짓찧었고, 함봉련이 밀었다는 등에는 다친 자국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다른 증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함봉련이 범인이 된 상황이었다.
정조는 그의 보고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10년째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함봉련을 석방하고, 김태명을 긴급 체포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을 줄여 처리했다. 아울러 함봉련에 대한 모든 문건을 불태우라 명령했다. 특히 함봉련에 대한 문서를 태우라 명한 것은 무죄를 받은 사람일 경우, 관청에 서류조차 남겨서는 안 된다는 굳은 의지의 표시였다. (최한나2018)
다만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것이 공정하고 양심적인 시민들이 없었기에 당시에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갈 수는 없었다.
“모갑이 피를 토하고 죽을 때, 자기의 부인에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김태명이다’라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인의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람들도 함봉련을 범인으로 지목했던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김태명에 대해 증언을 할 수 없었던 건 김태명은 마을 유지였고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요즘의 대기업 갑질 논란처럼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함봉련이 죽인 것처럼 주변 노비들의 증언이 조작된 부분이 있었던 거죠. 당시엔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노비의 억울함은 풀어주지 않았고, 주인이 죄를 짓고 노비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한나(2018). 앞의 책)
정의로운 세상은 정의로운 시민이 만들어간다. 정의로운 시민이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에 적극적인 시민이다. 10년 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22위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시민의식 순위는 26위라고 했다. 22대 총선을 치른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의 시민의식 순위는 세계에서 100위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