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전승 소식을 들은 세종은 오히려 고민에 빠졌다. 개선장군 최윤덕의 공을 어떻게 포상할지를 두고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최윤덕은 세종의 말처럼 “대마도를 정벌한 것보다 배나 되는 공로”를 세웠다. 그럼에도 세종이 선뜻 그를 중용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문신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최윤덕은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무문(武門)에서 자라나 학문에는 아는 것이 없고, 손자·오자의 병법만을 대강 익혔을 뿐”이었다(세종실록 17년 6월 24일). 그러다 보니 글을 짓거나 말을 하는 데 세련됨이 부족했고, 문신들이 주도하던 조정에서는 자칫 무시당할 우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정(北征)의 공로만을 이유로 정승 자리를 내리는 것도 세종은 내켜 하지 않았다. “수상(首相=정승)은 그 임무가 지극히 무겁다. 따라서 전공(戰功)만으로 그 벼슬을 줄 수는 없다”(세종실록 15년 5월 16일)는 말에는 그의 깊은 고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전공을 이유로 최고 관직을 내리는 것은 세종의 인사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하되(세종실록 17년 12월 9일), 관직은 어디까지나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세종실록 6년 2월 17일).
결국 세종은 승지 김종서를 불렀다. 늘 정확한 정보와 균형 잡힌 조언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던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경은 지난해의 일을 기억하는가?”라고 물으며, 1432년 김종서가 최윤덕에 대해 “비록 학문은 부족하나 마음이 정직하고 뚜렷한 허물이 없으며, 용병의 재략이 뛰어나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고 평가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평가는 불과 10개월 뒤 파저강 토벌의 대승으로 증명된 상태였다. 다만 "말하는 것이 절실하지 못하다”는 게 그의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었다.
실제로 태종 때 무인 출신 조영무가 정승에 올랐지만, 같은 정승인 하륜의 정무 처리에 대해 뚜렷한 의견을 내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 세종은 정승이란 단지 일을 잘하는 사람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은 물론, 국가가 추진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백성과 임금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힘까지 갖추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세종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정승을 지냈을까. 세종 재위 33년 동안 정승을 역임한 인물은 모두 15명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황희나 맹사성처럼 오랜 기간 정승직을 맡아 각각 22년, 8년 동안 세종의 정치를 보좌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 치세의 전성기 뒤에는 바로 이런 뛰어난 인물들의 안정된 보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시대의 판서와 참판, 곧 오늘날 장차관급 인사를 살펴보면 또 하나 특징이 보인다. 국정 운영의 핵심 부처 책임자를 자주 바꾸지 않고 오래 맡겨 성과를 내게 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중국의 사례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육부 상서 가운데는 20~30년 동안 재임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인재를 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허물도 용서하지 못하니, 나는 중국의 제도가 부럽고 우리나라가 부끄럽다”(세종실록 23년 6월 12일).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종은 참판 이상의 재상들을 장기간 재직하게 하여 성과를 내도록 했다. 특히 교육과 외교를 맡은 예조, 재정을 담당한 호조, 국방을 책임진 병조의 재상들은 평균 6.8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세종은 크고 작은 국가 사업을 담당한 공조에서는 책임자와 보조자가 긴밀히 협력하도록 하여 정책 추진의 효율을 높였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