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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30호] 최윤덕과 세종의 강점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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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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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30호]

최윤덕과 세종의 강점경영

 
세종시대 인물 가운데 유명하면서도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꼽으라면 최윤덕을 들 수 있다. 그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그릇을 굽는 천인 밑에서 자랐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기력이 남달랐고 활쏘기에도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산중에서 소를 먹이다가 달려드는 호랑이를 화살 한 발로 쓰러뜨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냥꾼 최윤덕을 명장으로 만든 두 사람

그런데 최윤덕을 훌륭한 장수로 만든 이는 실상 서미성(徐彌性, 서거정의 아버지)이었다. 마침 서미성이 경상도 합포의 수령으로 와 있을 때 최윤덕을 만나 시험해보았는데, 활을 쏘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서미성은 “이 아이가 비록 손은 빠르나 아직 병법을 모르니 한낱 사냥꾼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활쏘기와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연려실기술》 권3). 어떤 스승을 만나는가에 따라서 사냥꾼에 머물 수도 있고, 최고의 장군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에피소드다.

최윤덕이 단순한 용맹한 장수를 넘어 역사적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는 세종과의 만남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저강 정벌’, 곧 세종 15년(1433) 압록강 건너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을 대파한 사건이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16세기 후반 편찬된 《국조정토록》에 전한다. 최윤덕의 군사들이 적진에 들어가 야영 울타리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큰 노루 네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불안해하던 군사들은 크게 술렁였다. 느닷없는 산짐승의 출현을 두고,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며 수군거렸다.

그때 최윤덕은 군사들을 불러 모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주나라 무왕이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황하를 건널 때, 흰 물고기가 왕이 탄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뱃사람이 ‘흰빛은 상나라의 색인데, 그 물고기가 왕의 배에 들어왔으니 이는 곧 상나라 사람들이 왕께 귀의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는 야인(野人)을 정벌하러 가는 길이다. 노루는 들에 사는 짐승[野獸 야수]인데, 그것들이 스스로 들어와 사로잡혔으니, 이는 곧 야인이 멸망할 징조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윤덕은 고전인 《서경》의 일화를 끌어와 예기치 않은 일을 길한 징조로 해석하고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이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조선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불과 아홉 날 만에 여진족 430여 명을 참살하거나 사로잡아 적을 제압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국경선을 끌어올리려는 태종 이래의 오랜 숙원이 이 토벌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왜 최윤덕의 정승 임명을 망설였나?

그런데 전승 소식을 들은 세종은 오히려 고민에 빠졌다. 개선장군 최윤덕의 공을 어떻게 포상할지를 두고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최윤덕은 세종의 말처럼 “대마도를 정벌한 것보다 배나 되는 공로”를 세웠다. 그럼에도 세종이 선뜻 그를 중용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문신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최윤덕은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무문(武門)에서 자라나 학문에는 아는 것이 없고, 손자·오자의 병법만을 대강 익혔을 뿐”이었다(세종실록 17년 6월 24일). 그러다 보니 글을 짓거나 말을 하는 데 세련됨이 부족했고, 문신들이 주도하던 조정에서는 자칫 무시당할 우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정(北征)의 공로만을 이유로 정승 자리를 내리는 것도 세종은 내켜 하지 않았다. “수상(首相=정승)은 그 임무가 지극히 무겁다. 따라서 전공(戰功)만으로 그 벼슬을 줄 수는 없다”(세종실록 15년 5월 16일)는 말에는 그의 깊은 고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전공을 이유로 최고 관직을 내리는 것은 세종의 인사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하되(세종실록 17년 12월 9일), 관직은 어디까지나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세종실록 6년 2월 17일).

결국 세종은 승지 김종서를 불렀다. 늘 정확한 정보와 균형 잡힌 조언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던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경은 지난해의 일을 기억하는가?”라고 물으며, 1432년 김종서가 최윤덕에 대해 “비록 학문은 부족하나 마음이 정직하고 뚜렷한 허물이 없으며, 용병의 재략이 뛰어나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고 평가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평가는 불과 10개월 뒤 파저강 토벌의 대승으로 증명된 상태였다. 다만 "말하는 것이 절실하지 못하다”는 게 그의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었다.

실제로 태종 때 무인 출신 조영무가 정승에 올랐지만, 같은 정승인 하륜의 정무 처리에 대해 뚜렷한 의견을 내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 세종은 정승이란 단지 일을 잘하는 사람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은 물론, 국가가 추진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백성과 임금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힘까지 갖추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세종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정승을 지냈을까. 세종 재위 33년 동안 정승을 역임한 인물은 모두 15명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황희나 맹사성처럼 오랜 기간 정승직을 맡아 각각 22년, 8년 동안 세종의 정치를 보좌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 치세의 전성기 뒤에는 바로 이런 뛰어난 인물들의 안정된 보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시대의 판서와 참판, 곧 오늘날 장차관급 인사를 살펴보면 또 하나 특징이 보인다. 국정 운영의 핵심 부처 책임자를 자주 바꾸지 않고 오래 맡겨 성과를 내게 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중국의 사례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육부 상서 가운데는 20~30년 동안 재임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인재를 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허물도 용서하지 못하니, 나는 중국의 제도가 부럽고 우리나라가 부끄럽다”(세종실록 23년 6월 12일).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종은 참판 이상의 재상들을 장기간 재직하게 하여 성과를 내도록 했다. 특히 교육과 외교를 맡은 예조, 재정을 담당한 호조, 국방을 책임진 병조의 재상들은 평균 6.8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세종은 크고 작은 국가 사업을 담당한 공조에서는 책임자와 보조자가 긴밀히 협력하도록 하여 정책 추진의 효율을 높였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곳에 장기 근무케 하여 성과를 내도록 하다

첫째, 교육과 외교를 맡은 예조에서는 ‘예법에 밝은’ 허조에 이어 신상과 권도가 장기간 직책을 맡으며(각각 11년 8개월간, 4년 4개월 판서 재직) 안정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펼쳤다. 허조는 태종이 “나의 주춧돌”이라 했던 인물로, 이조·예조 판서를 지내며 인재를 검증하고 국가의 예제와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뒤를 이은 신상은 예조판서를 무려 11년 8개월 동안 맡았다. 그는 장광설의 인물로, 어전회의에서 “지나치게 길게 발언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중국 사신 접대와 여진족 외교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전문 통역관 양성, 과거제도 정비, 성균관 발전 등 교육·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요컨대 허조와 신상은 어전회의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쳐 정책을 마련하고, 한번 정해진 방향은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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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 역시 ‘재리에 밝은’ 안순과 목진공 같은 인물에게 장기간 맡겨(각각 11년 4개월간 판서 재직, 4년 7개월간 참판 재직) 연이은 흉년 속에서도 경제 위기를 극복하게 했다. 특히 안순은 호조참판과 판서를 지내며 12년 가까이 국가 재정을 담당했다. 그는 화폐 유통 정책, 공법 중심의 세제 개혁, 수차와 양잠 장려 등 농업 생산력 증진책을 추진하며 세종 정부의 재정 기반을 다졌다. 안순은 평소 검소하고 재정 운영에 엄격해 인색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에 시달리면 누구보다 먼저 구휼책을 마련한 성실한 관리였다. 세종이 재정 분야를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 맡긴 이유 역시 이런 책임감과 전문성 때문이었다.

셋째, 국방을 책임진 병조 역시 ‘병법에 밝은’ 조말생을 중용해 대마도 정벌 등 초기 국방 정책을 맡겼다(7년 8개월 판서 재직). 이어 재위 중반에는 최윤덕과 최사강 등을 병조의 책임자로 기용해 장기적인 국방 전략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게 했다. 국방분야에서도 단기간 성과에 흔들리지 않고,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인물에게 오랫동안 맡겨 안정된 결과를 얻게 한 것이다.

책임자와 보조자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국책사업을 이끌게 하다

넷째, 사회 기반 시설과 국가 사업을 담당하는 공조의 경우 다른 부처와의 유기적 협력을 통해 중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했다. 세종은 악기 제작과 무기 개발, 과학기술 진흥이 활발하던 시기에 성억과 이천을 짝을 이루게 해 사업을 완수하도록 했다(각각 4년 11개월 판서 재직, 5년 9개월 참판 재직). 특히 이천은 공조참판을 거쳐 다시 호조판서를 맡으며 과학기술과 무기 개발에 필요한 재정을 안정적으로 지원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세종은 인물을 선발한 뒤에는 장기간 근무하게 하여 전문성을 키우는 데 역점을 두었다. 실제로 세종시대의 인재들은 평균 18년에 걸쳐 비로소 자기 분야의 대가로 성장했다. 짧게는 4년에서(신숙주) 길게는 37년에(최윤덕)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랜 시간 업무의 본질을 익히고 조직 장악력과 비전 공감의 리더십을 키워 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시대의 명재상들 가운데 상당수가 젊은 시절 탄핵이나 파직 같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작은 허물만으로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경험 속에서 성장할 기회를 주었다. 또한 많은 재상들이 지방 관찰사를 지낸 점도 눈에 띈다. 중앙과 지방 근무를 함께 경험하게 함으로써 현장 감각과 국가 전체를 보는 기획력을 함께 갖추도록 한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최윤덕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은 무인 출신의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단지 전투에 능한 공로자가 아니라, 백성과 관료들의 신뢰를 받을 만한 리더라는 김종서의 판단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신하들 역시 “최윤덕은 덕망이 공평하고 청렴하며,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봉공(奉公)하는 인물이니 비록 수상, 곧 영의정에 오른다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세종의 말에 뜻을 함께했다(세종실록 15년 5월 16일). 학벌이나 말솜씨 같은 약점보다, 나라를 맡길 만한 자세와 공적인 태도, 그리고 인재의 본질에 주목한 것이다. 사람의 단점보다 강점을 보고, 그 강점이 나라를 위해 발휘되도록 길러낸 것. 바로 그런 강점경영이 세종치세를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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