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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4호] 먼저 이기고 나중에 싸운다 : 세종의 ‘이기는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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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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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된 드라마 <약한 영웅>은 ‘이기는 경영’의 요체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연시은(박지훈 분)은 상위 1%의 모범생이지만, 공부에만 몰두할 수 없게 만드는 왜곡된 학교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싸움을 강요받는다. 그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는다. 대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심리전, 지형지물을 활용한 전략,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겨냥하는 집요함으로 싸움을 마무리한다. 곧, 먼저 이길 판을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싸워 이기는 전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승리는 싸움 전에 결정된다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君子 有不戰 戰必勝 군자 유부전 전필승].”(정조실록 2년 6월 4일) 조선 후기의 군주 정조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평화를 지향하되, 위기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정조는 어떻게 해야 반드시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대외 전쟁이 거의 없었던 장기적 평화의 국면에 놓여 있었던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에 비해 세종은 ‘이기는 전쟁’의 구체적 방법까지 보여주었다. 그는 원칙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반드시 이기는’ 방략을 실제로 구현해 보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재위 중반에 단행된 두 차례의 파저강 정벌이다. 1433년 4월의 1차 정벌과 1437년 9월의 2차 정벌이 그것이다. 두 전투는 목표와 지휘관, 동원 병력과 전과에서 차이를 보이지만(표 참조), 모두 세종이 설계한 ‘이기는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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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제1차 파저강 정벌은 국내와 국외를 동시에 겨냥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먼저 국내 차원이다. 재위 중반에 접어들면서 국가적 관심이 인재 검증을 명분으로 한 이른바 ‘신상 털기’에 쏠려 있었다(신개의 ‘생대구사건’). 양녕대군 탄핵과 같은 정쟁적 의제가 어전 회의를 장악하며 국론은 소모적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명나라 사신 윤봉 일행의 무리한 요구와 무례한 처신까지 겹치면서, 나라 전체에 피로와 불만이 쌓여가던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세종은 시선을 북방으로 돌렸다. 북방 영토 개척이라는 대외 이슈를 전면에 제기함으로써, 분산된 국정을 하나의 목표로 수렴시키고자 한 것이다.

파저강 정벌, 이기는 전쟁의 모범 사례

그즈음인 1432년 12월 초, 파저강(婆猪江, 압록강의 중국 쪽 지류인 혼강의 옛 이름) 일대의 여진 추장 이만주가 400여 기의 병력을 이끌고 여연 지역에 침입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병조판서를 긴급히 소집했다. 그는 ‘심히 노한’ 기색으로 이번 기회에 여진을 정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했다.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경내로 진입해야 하는 만큼, 자칫 외교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튿날 세종은 다시 회의를 열어 토벌 문제를 의제로 올렸다. 세종은 “외환이 없으면 나라가 해이해진다”면서 대의에 따라 결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재위 초 대마도 정벌과 같은 선제적 조치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논의는 점차 기울었다. 황희 역시 “치욕을 당하고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마침내 북정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장애물은 최윤덕의 반대였다. 그는 “열 그루 나무를 베어야 겨우 하늘이 보일 정도의 험지”를 준비 없이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보았다.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서른아홉 차례에 걸쳐 회의를 열고, 예상되는 모든 문제를 점검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게 했다. 현지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정보 축적도 병행했다. 이러한 축적된 준비가 결국 최윤덕을 움직였다. 그는 “지금은 땅이 얼고 물이 불어나 있으니, 봄이 되어 수세가 안정되는 4, 5월에 출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바꾸었다. 세종은 이를 즉각 수용했다. “경의 말이라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군사의 진퇴는 모두 경의 판단에 맡기겠다.”(세종실록 15년 1월 19일) 지휘권을 전적으로 위임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윤덕이 이끄는 정벌군은 1433년 4월 19일 새벽, 일곱 방향에서 기습을 감행해 9일 만에 전투를 마무리했다. 여진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세종실록 15년 5월 5일). 이 정벌을 통해 세종은 국정의 흐름을 전환하고, 북방 경영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나아가 4군 6진 개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먼저 움직이면 남을 제어하고, 뒤에 움직이면 남에게 제어를 받는다[先發制人 後發制於人 선발제인 후발제어인]”는 그의 신념을 현실 속에서 구현한 사례였다(세종실록 19년 6월 19일).

싸우기 전에 이기는 전쟁: 정보와 시기의 전략

다음은 대외 관계 차원이다. 제1·2차 정벌은 공통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승패의 구조를 만들어 놓는 ‘이기는 싸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컨대 세종은 제1차 정벌 직후, 곧바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던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적 정당성과 지원을 확보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제2차 정벌에서는 더욱 치밀했다. 소수 병력으로 변경을 순찰하며 적의 경작을 방해하고, 추수기에는 곡식을 소각하며, 소굴을 타격해 적이 버틸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나아가 여진 부족 간의 분열을 유도해, 목표였던 이만주 세력을 고립시켰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적이 불리한 조건에 놓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에는 철저한 정보전이 있었다. 세종은 정탐과 정보 수집을 통해 적의 병력 규모와 지형, 부족 간 거리까지 면밀히 파악했다(세종실록 15년 2월 10일 등). 동시에 우리 측 작전은 철저히 은폐했다. 적이 조선의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일부러 온양으로 행차해 경계를 늦추게 하는 기만책까지 구사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4일). 또한 작전 관련 정보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거듭 지시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2·23일; 19년 6월 9일; 7월 2일).
 
실록에 따르면, 당시 평안도 강변 일대에는 상시 활동하는 첩보 인력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세종은 “병가에서는 정직함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면 기이한 술책도 병행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필요할 경우 특수 임무까지 수행하게 했다. 실제로 사형수 가운데 용맹하고 지리에 밝은 자를 선발해 압록강 너머로 잠입시키고, 밤을 틈타 적의 소굴을 정탐하게 한 기록도 보인다(세종실록 19년 10월 17일).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기’에 대한 집요한 통제였다. 세종은 제2차 정벌을 앞두고, 호전(好戰)이 아니라 지중(持重), 곧 충분히 조건이 무르익기 전까지는 결전을 서두르지 말 것을 강조했다. “적의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성급히 결전을 택했다가 패하면 그 해가 작지 않다”는 경계였다. 따라서 적이 침입하기 전 백성을 보루로 들이고 성을 굳게 하며, 들판을 비워[淸野 청야] 적이 얻을 것이 없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요행이 아니라 ‘승리를 제압하는 장책[制勝之長策 제승지장책]’으로 승리를 확보하라는 뜻이었다(세종실록 19년 8월 6일).
 
그러나 세종은 방어에만 머무는 것도 경계했다. 지킬 때와 칠 때를 구분하지 못해 기회를 놓치는 것을 더 큰 문제로 보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437년 송희미 사건이다. 그는 적이 물러나 세력이 약해진 뒤에도 공격하지 않았고, 상황 보고조차 소홀히 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변방 지휘관인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자결 지시). 이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 ‘이기는 전쟁’이란 지키는 것과 공격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 조치였다.
 
세종은 제1차 정벌 때 “국경을 스스로 굳게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허조 등 다수 신료의 의견이 아니라, “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며 시기를 살려 정벌해야 한다는 황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2차 정벌에서도 신하들은 “적이 침노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자”고 했으나, 세종은 “이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선제적 토벌을 결단했다(세종실록 19년 5월 16일). 이어 적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는 “기습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19년 7월 19일).

멱살잡이가 아닌, 뒷덜미잡이를 한 군주들

조선 전기의 걸출한 군주로 태종·세종·세조를 들 수 있다.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은 ‘먼저 이기고 나중에 싸운다’는 이기는 경영이다. 태종은 이를 “선발제지(先發制之)”로 표현했다. 먼저 움직여 사태를 제압한다는 뜻으로, 정도전 제거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태종실록 1년 11월 20일). 세종은 이를 “선발제인(先發制人)”으로 발전시켰다. “먼저 일어나면 남을 제어하고, 뒤에 일어나면 남에게 제어당한다”는 인식이다(세종실록 19년 6월 19일). 세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어미쟁(定於未爭)”, 곧 싸우기 전에 이미 승부를 정해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치밀한 준비와 단호한 실행으로 정적을 제압하며, “싸우기 전에 이미 대비해 두기 때문에 이긴다”고 하여 승리의 요체를 분명히 했다(세조실록 「총서」).
 
결국 세 임금이 공통으로 보여준 것은, 결정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이다. 중요한 것은 싸움의 유무가 아니라, 반드시 이길 싸움을 선택하는 데 있다. 뛰어난 리더의 경쟁은 정면으로 얽히는 ‘멱살잡이’가 아니라, 흐름을 주도하는 ‘뒷덜미잡이’에 가깝다. 주도권을 쥔 채 상대를 자신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 — 이것이 곧 이기는 경영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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