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대외 관계 차원이다. 제1·2차 정벌은 공통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승패의 구조를 만들어 놓는 ‘이기는 싸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컨대 세종은 제1차 정벌 직후, 곧바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던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적 정당성과 지원을 확보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제2차 정벌에서는 더욱 치밀했다. 소수 병력으로 변경을 순찰하며 적의 경작을 방해하고, 추수기에는 곡식을 소각하며, 소굴을 타격해 적이 버틸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나아가 여진 부족 간의 분열을 유도해, 목표였던 이만주 세력을 고립시켰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적이 불리한 조건에 놓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에는 철저한 정보전이 있었다. 세종은 정탐과 정보 수집을 통해 적의 병력 규모와 지형, 부족 간 거리까지 면밀히 파악했다(세종실록 15년 2월 10일 등). 동시에 우리 측 작전은 철저히 은폐했다. 적이 조선의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일부러 온양으로 행차해 경계를 늦추게 하는 기만책까지 구사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4일). 또한 작전 관련 정보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거듭 지시했다(세종실록 15년 3월 22·23일; 19년 6월 9일; 7월 2일).
실록에 따르면, 당시 평안도 강변 일대에는 상시 활동하는 첩보 인력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세종은 “병가에서는 정직함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면 기이한 술책도 병행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필요할 경우 특수 임무까지 수행하게 했다. 실제로 사형수 가운데 용맹하고 지리에 밝은 자를 선발해 압록강 너머로 잠입시키고, 밤을 틈타 적의 소굴을 정탐하게 한 기록도 보인다(세종실록 19년 10월 17일).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기’에 대한 집요한 통제였다. 세종은 제2차 정벌을 앞두고, 호전(好戰)이 아니라 지중(持重), 곧 충분히 조건이 무르익기 전까지는 결전을 서두르지 말 것을 강조했다. “적의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성급히 결전을 택했다가 패하면 그 해가 작지 않다”는 경계였다. 따라서 적이 침입하기 전 백성을 보루로 들이고 성을 굳게 하며, 들판을 비워[淸野 청야] 적이 얻을 것이 없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요행이 아니라 ‘승리를 제압하는 장책[制勝之長策 제승지장책]’으로 승리를 확보하라는 뜻이었다(세종실록 19년 8월 6일).
그러나 세종은 방어에만 머무는 것도 경계했다. 지킬 때와 칠 때를 구분하지 못해 기회를 놓치는 것을 더 큰 문제로 보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437년 송희미 사건이다. 그는 적이 물러나 세력이 약해진 뒤에도 공격하지 않았고, 상황 보고조차 소홀히 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변방 지휘관인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자결 지시). 이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 ‘이기는 전쟁’이란 지키는 것과 공격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 조치였다.
세종은 제1차 정벌 때 “국경을 스스로 굳게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허조 등 다수 신료의 의견이 아니라, “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며 시기를 살려 정벌해야 한다는 황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2차 정벌에서도 신하들은 “적이 침노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자”고 했으나, 세종은 “이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선제적 토벌을 결단했다(세종실록 19년 5월 16일). 이어 적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는 “기습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19년 7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