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께, 조식을 한국형 기업가정신의 원형으로 재조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기업가정신은 애초부터 완성된 개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기업인들 또한 정해진 이론의 틀 속에서만 움직여 온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기업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역사 속에서 성찰하고 모색하려는 시도는, 비판의 대상이기보다 오히려 장려하고 응원할 일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서구에서 기업가정신이 자리 잡아 온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칼뱅의 ‘직업소명설’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발전의 원류로 재해석한 이는 막스 베버(Max Weber)였고, 기업가(entrepreneur)의 의미를 정태적 균형에 머물던 경제를 ‘혁신(innovation)’을 통해 동태적 발전으로 이끄는 주체라고 정의한 인물은 슘페터(J. Schumpeter)였다. 피터 드러커(P. Drucker)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업을 넘어 정부와 사회 전반의 혁신 조건으로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제시하며 이를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다시 말해, 서구의 기업가정신 또한 끊임없는 재해석과 확장을 거치며 발전해온 개념이다. 그렇다면 조식을 ‘K-기업가정신의 원류’로 바라보려는 시도 역시 전통을 새롭게 읽고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지적·문화적 실험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신중함은 필요하다. 조식에게 그러한 면모가 보인다고 해서, 혹은 대기업 창업주들의 출신지가 서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단정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지금 더 중요한 과제는 창업주들이 숱한 난관을 넘어서며 기업을 성장시켜 온 과정을 차분히 기록하고, 그 속에서 경영철학의 핵심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아울러 조식의 언행 가운데 오늘의 기업가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외물(外物)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성성(惺惺)의 자각이 그러하다. 조식은 마음의 수양을 말에만 두지 않고, 몸의 단련을 통해 정신을 바로 세울 것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기업가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학자는 길을 밝혀 주고, 정치가와 행정공무원들은 불필요한 제약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기업가 스스로는 조직과 개인의 이해가 충돌할 때 사사로운 욕망을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조식이 말한 ‘시살(廝殺)’처럼, 사욕을 적으로 삼아 철저히 제거할 때 기업은 위기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