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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4호] K-기업가정신의 뿌리 찾기: 남명 조식에서 세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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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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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 〈K-기업가정신의 원형, 세종 리더십〉에 대해 몇몇 독자들께서 의미 있는 의견을 보내주셨다. 그중 하나는 경남 진주시 등을 중심으로 남명 조식에게서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최근의 움직임을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조식은 무엇보다도 선비정신의 상징적 인물인데, 이를 기업가정신의 원류로 규정하는 접근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문제 제기였다. 더 나아가 조식의 유적지인 산청과 대기업 창업자들의 출신지인 진주·의령 등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혹은 혈연이나 사승(師承)을 매개로 ‘남명 정신’과 ‘창업 정신’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에 가깝다는 지적도 함께 주셨다.

‘남명 정신’은 기업가정신이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분께, 조식을 한국형 기업가정신의 원형으로 재조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기업가정신은 애초부터 완성된 개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기업인들 또한 정해진 이론의 틀 속에서만 움직여 온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기업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역사 속에서 성찰하고 모색하려는 시도는, 비판의 대상이기보다 오히려 장려하고 응원할 일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서구에서 기업가정신이 자리 잡아 온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칼뱅의 ‘직업소명설’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발전의 원류로 재해석한 이는 막스 베버(Max Weber)였고, 기업가(entrepreneur)의 의미를 정태적 균형에 머물던 경제를 ‘혁신(innovation)’을 통해 동태적 발전으로 이끄는 주체라고 정의한 인물은 슘페터(J. Schumpeter)였다. 피터 드러커(P. Drucker)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업을 넘어 정부와 사회 전반의 혁신 조건으로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제시하며 이를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다시 말해, 서구의 기업가정신 또한 끊임없는 재해석과 확장을 거치며 발전해온 개념이다. 그렇다면 조식을 ‘K-기업가정신의 원류’로 바라보려는 시도 역시 전통을 새롭게 읽고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지적·문화적 실험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신중함은 필요하다. 조식에게 그러한 면모가 보인다고 해서, 혹은 대기업 창업주들의 출신지가 서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단정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지금 더 중요한 과제는 창업주들이 숱한 난관을 넘어서며 기업을 성장시켜 온 과정을 차분히 기록하고, 그 속에서 경영철학의 핵심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아울러 조식의 언행 가운데 오늘의 기업가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외물(外物)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성성(惺惺)의 자각이 그러하다. 조식은 마음의 수양을 말에만 두지 않고, 몸의 단련을 통해 정신을 바로 세울 것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기업가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학자는 길을 밝혀 주고, 정치가와 행정공무원들은 불필요한 제약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기업가 스스로는 조직과 개인의 이해가 충돌할 때 사사로운 욕망을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조식이 말한 ‘시살(廝殺)’처럼, 사욕을 적으로 삼아 철저히 제거할 때 기업은 위기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형은 세종인가?

또 다른 독자께서는 “K-기업가정신의 원형은 역시 세종대왕”이라고 말씀하셨다. 국왕이란 민생과 안전은 물론, 구성원들이 화합하며 살아가도록 이끄는 종합적 국가경영자이며, 기업가들 역시 세종에게서 그러한 경영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세종이 이른바 ‘K21’로 불리는 과학기술적 성과를 남기고, 이를 통해 민생과 안전, 나아가 국격까지 크게 끌어올린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 성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했는지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글에서는 그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세종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이전 칼럼 [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3호]에서 나는 세종의 사람 중심 기업가정신에 대해서 두 개의 탐구적 질문을 통해 살펴보았다. 즉 ① 사람 중심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② 세종은 과연 성공적인 리더였는가를 검토했다.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성과가 어떤 조건과 과정 속에서 가능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민생, 국방, 국격 향상이라는 세 가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소통의 혁신’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전통시대 고전에서 ‘소통(疏通)’은 단순한 말의 소통(communication, 의사소통)이 아니라, 자리의 소통(coordination)의 의미까지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세종의 경우, 이 둘 중에서 ‘인재 소통’보다 ‘말의 소통’을 앞에 두었다. 그는 ‘자리 주기보다 말의 채택을 더 중시했다. 집현전 학사 이석형 등이 편찬한 『치평요람』에서 “빼어난 인재를 등용[擧賢]하고도 그 말을 채택[得用]하지 않으면, 인재를 얻었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속이 없다”고 한 구절은, 세종 시대 사람들의 소통 철학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세종에게 소통이란 요컨대, 인재의 말과 생각이 정책과 제도로 이어지게 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국가에 이로운 말이라면 적극 채택하는 것을 국가지도자의 소임으로 여겼다. 그러면 그 소임을 달성하기 위해 그가 한 일은 무엇일까?

‘소통’의 무게 중심을 바꾸다—자리가 아니라 말이다

첫째, 세종은 실질적 소통을 위해 인재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정성을 들였다. 그는 회의 때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의논하여 아뢰라”고 물으며 발언을 독점하지 않았다. 특히 세종이 중시한 것은 에둘러 말하는 타협이 아니라, 옳다고 여기는 바를 곧장 말하는 ‘절실하고 강직한[切直]’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어전회의에서 다수 의견에 맞서 소신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하는 자가 없다”는 세종의 개탄이 이를 잘 보여준다(세종실록 7/12/8). 최고 권력자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이 더욱 어려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세종은 바로 이 침묵의 관성을 깨기 위해, 제도와 관행을 함께 바꾸는 개혁에 나섰다.

세종은 먼저 종래의 군주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경연(經筵)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다섯 차례 이상 경연을 직접 주재하며, 이를 단순한 학문 강론의 자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발언과 정책적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공론의 장으로 키워갔다. 그 밑바탕에는 인재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세종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경연이 열리던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열린 학습 공간이었다. 사정전 바로 곁의 집현전(集賢殿)은 그 아이디어를 다듬고 실행 가능성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장이었다. 상사독서제(上寺讀書制)의 도입, 《고려사》와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같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이 경연을 통해 탄생했다.
 
세종은 아예 조언 그룹을 제도화하기도 했다. 각 부처의 실무 관료들—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이 순번을 따라 차례로 왕에게 정사를 아뢰도록 한 윤대(輪對)제도의 도입이 그것이다. 1425년(세종7) 6월, 변계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된 이 제도는 세종의 말처럼 “숨김없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인재를 가려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세종실록 13/3/5).

적소적재 - 사람보다 일을 먼저 정하다

둘째는 강점 중심의 인재 선발과 ‘적소적재’의 실천이다. 세종은 부왕 태종에게서 물려받은 인재 철학, 곧 강점을 살리는 경영 원칙을 일관되게 이어갔다. 태종이 “모든 덕목을 갖춘 인재는 없다[材不可以求備]”며 사람을 결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듯이(태종실록 16/5/6), 세종 역시 완전한 인물을 찾기보다 자리에 맞는 사람을 찾고 길러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허물만 들추는 평가 속에서는 누구도 역량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고, “사람마다 반드시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다”는 전제에서 인재를 바라보았다.
 
세종의 인재 운용은 각자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배치와, 약점을 타인의 강점으로 메우는 상호보완의 설계였다. 그는 개인의 역량을 따로 관리하기보다, 강점과 강점을 연결해 조직 전체의 시너지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강점의 연쇄순환). 세종식 인재 등용의 핵심은 먼저 ‘일’을 정하고, 그 일에 맞는 사람을 찾는 데 있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적재적소가 아니라, 그 역(逆)의 개념인 적소적재(適所適材)의 원칙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자리를 만들기보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먼저 규정하고 그 요구에 부합하는 인물을 발탁한 것이다. 세종은 국가 경영의 출발점을 개인의 능력이나 충성심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과제의 정의에 두었다. 그는 먼저 국가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이를 해결할 핵심 과업을 제시했다.
 
북방 개척, 음악 제도의 혁신, 과학기술의 진흥, 국방력 강화와 같은 국가적 과제가 설정되면, 세종은 그에 맞는 전문성과 실행력을 지닌 인재를 찾아냈다. 김종서는 북방 개척의 총책으로, 박연은 음악 혁신의 중심 인물로, 장영실은 과학기술 개발의 핵심으로, 최윤덕은 축성(築城) 사업을 포함한 국방 강화를 책임졌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세종이 제시한 국가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 갔다.
 
요컨대 세종의 인재 경영은 ‘사람 중심 행정’이 아니라 ‘사명 중심 조직 운영’이었다. 그는 먼저 일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인재를 배치함으로써 국가의 비전과 개인의 역량을 하나로 엮었다. 이는 오늘날의 프로젝트 기반 조직이나 임무 지향형 리더십과도 상통하는, 세종식 전략 인사의 정수라 할 만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세종이 서거했을 때, 신하들은 그의 인재 쓰기를 단 여덟 글자로 요약했다. 바로 “측석연영 허금납충(側席延英 虛襟納忠)”이다(세종실록 32/2/22). 곁에 자리를 내어 뛰어난 인재를 초빙하고[延英], 흉금을 활짝 열어 그들의 충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納忠]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세종 리더십의 본질이었다. 인재를 단순히 불러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마음을 다해 일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대하고 존중했다. 덕분에 당대 인재들은 각자 맡은 바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사람을 모으는 리더는 많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명을 완성하게 한 리더는 드물다. 세종이 남긴 가장 큰 리더십 유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세종의 사람 중심 기업가 정신은 오늘의 기업인들에게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세종식 소통, 특히 그의 질문법을 현대의 글로벌 리더십 담론 속에 놓아 본다면 어떤 통찰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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