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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7호] 25세 청년 군주 세종의 모습 스케치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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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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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군신지의(君臣之義)와 부자지은(父子之恩)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그의 아들 임맹손의 처리 문제였다. 그다음 달인 3, 사헌부 관리 심도원은 임군례가 위험한 발언을 할 때 임맹손이 옆에서 이를 듣고 아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만류했다는 증언이 있다며 연좌 처벌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너의 말이 옳지 않다라고 답하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君臣之義]가 비록 중하나,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父子之恩] 또한 크다. 어찌 군신의 의리로 부자의 은혜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라며 처벌을 반대하였다.

 

세종에 따르면, 임맹손이 아버지의 옷깃을 붙잡고 위험한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효심을 다한 일이었으므로, 그 점을 들어 난역에 가담한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사헌부 관리가 어전에서 물러난 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심도원은 법을 맡은 관원인데, 임맹손이 그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만 유죄를 논하면서, 정작 아버지를 염려한 효심은 알지 못하니, 어찌 법을 안다고[知法] 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3315)

 

이 대목을 읽을 때, 어떤 분은 사헌부 관리는 마치 법 기계와 같다고 말했다. 임맹손에게 역모죄를 적용해서 한 명이라도 더 처벌 숫자를 늘리려는 실적주의 폐해라고도 말했다. 다른 분은 군신지의(君臣之義) 못지않게 중요한, 어찌보면 더 중요한 부자지은(父子之恩)의 가치를 살려 아들 임맹손을 살려낸 세종의 마음에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볼 때, 사헌부 관리는 법치(rule of law)’의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법률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에 비해 세종은 높은 단계의 법치, 법치를 토대로 하되 그 틀에 갇히지 않고, 경제·안보·외교·교육 등 국가경영 전반을 아우르며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비유컨대, 사헌부 관리는 법을 마치 우리 몸을 옥죄는 철제 구조물처럼 여긴데 비해, 세종은 법을 처럼 여기며, “몸을 감싸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했다. (철제 구조물과 옷은 월터 리프먼의 비유)

 

국가의 존재 의의를 잊은 관리들에 대한 질책
세종실록재위 3년 기록 중에서 세종다움을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은 새해 초에 신하들에게 내린 세종의 당부다. 세종은 요즘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다스림의 대의는 돌아보지 않고[不顧大義 불고대의], 오직 일 처리에만 마음을 쏟아[辦事爲心 판사위심] 민간에 대여한 곡식의 징수를 지나치게 독촉한다고 지적했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먹을 양식조차 없는 상황인데도, 관리들은 실적을 올리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종은 그러한 백성에게는 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분명히 지시했다(세종실록 313).

 

곡식 징납 실적을 높이거나 죄인 처벌 건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한 관리들이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왕과 관리가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었다. 바로 이 점이 세종이 깊이 안타까워한 지점이다. 더욱 아쉬운 점은, ‘성과실적에 치우쳐 본질을 잊는 모습이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법의 참뜻을 깨닫는 법조인과 정치의 대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행정인이 날로 늘어나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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