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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7호] 25세 청년 군주 세종의 모습 스케치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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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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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독 범위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습니다.” 

지난번 세종실록 강독 발제를 맡았던 분의 이야기다. 실제로 세종 재위 3년째인 1421년은, 얼핏 보기에 세자 책봉(10)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 보였다.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기르던 코끼리가 사람을 쳐 죽게 한 사건(3) 정도가 주목을 끌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세종실록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한 시간 안에 강독을 마치자던 당초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스물다섯 살 청년 군주 세종이 이 시기에 마주한 정치적 쟁점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청년 군주 세종의 설날 풍경>

우선 새해 첫날 풍경이다. 세종은 창덕궁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예[賀禮·하례]를 취했다. 하례 때 악기는 진설하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는데 왕의 어머니 원경왕후가 5개월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여러 도의 관찰사가 보내온 축하 인사와 선물(지방 특산물)을 받은 세종은 곧장 경기도 남양주에 있던 풍양(豊壤) 이궁(離宮)으로 향했다. 풍양 이궁에 도착한 세종은 부왕 태종께 오래오래 사시라는 새해 인사[獻壽·헌수]를 드렸다. 임금의 친족인 종친(宗親)과 훈공(勳功)을 세운 신하, 그리고 종2품 이상의 재상 58명도 설날 축하 잔치에 참여했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갈 즈음에 태종은 원경왕후가 살아있을 때는 주상의 새배를 함께 받았는데, 이젠 다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여읜 세종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 슬퍼한 것이다.

 

슬퍼하는 태종을 본 좌의정 박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종도 곧 일어나 부왕께 다가가 춤을 청하며 함께 하시기를 권했다. 태종은 아들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며 말했다. “온 나라 신하들이 나를 이렇듯 아끼니 나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춤추는 시간이 길어지자 예조판서 허조가 옥체의 피로를 염려하며 만류했다. “나는 매일 산을 타고 꿩을 사냥하여도 피곤하지 않거늘, 이런 일로 어찌 피로하겠는가라는 태종에게 허조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께서 매일 산 타시는 것을 신은 늘 근심하고 있습니다라고 재차 말했다. 사냥 중에 부상당할까 염려한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참으로 글 읽는 사람의 말이로다라며 연회를 파하였다(세종실록 311).


<‘사건말고 콘텐츠관점에서 실록 읽기>

흔하디흔한 설날 풍경을 이토록 자세히 묘사한 까닭은, 실록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건중심으로 접근하면 이 기록은 쉽게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실록 원문[漢文]으로 겨우 열두 줄에 불과한 이 대목도, ‘콘텐츠라는 관점에서 보면 3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 이를테면 제후국 조선의 외교 하례(賀禮), 지방 관찰사가 보낸 축하 인사와 특산물, 새배 장면에 담긴 복색과 덕담, 부자간에 정을 나누는 장면, 군신이 어울려 즉흥적으로 춤추는 모습, 선비의 간언과 그 뜻을 수용하는 임금의 태도 등 짧은 기록 속에 담긴 콘텐츠의 결은 실로 다양하고 깊다.

이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임금께 진상된 지방 특산물이다. 며칠 뒤인 113일자 기록을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온 홍시(紅柿)와 전복, 함경도에서 진상된 고등어[古道魚 ·고도어]와 내장젓, 제주에서 올린 감귤[柑子 · 감자]과 유자(柚子)와 미역, 그리고 전주에서 만든 유밀과와 엿 등이 물목(物目)으로 등장한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에 간행되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일부를 미리 들춰보는 듯하다.


서울 대홍수로 위기관리 시험대에 오른 세종

그해 여름, 서울을 덮친 대홍수는 세종의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61일부터 시작된 폭우는 거의 한 달 가까이 물을 퍼붓듯쏟아졌다. 창덕궁 인정전의 망새(용마루 양 끝의 장식)가 모두 무너졌고, 청계천 하류가 막혀 인가(人家) 75호가 떠내려가는 피해를 입었다. 세종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사망자 가족에게 부의 물품을 내려 장례를 치르게 한 것이었다(612). 이어 공조에 명해 무너진 행랑을 보수하게 하고, 수문이 막히지 않도록 24시간 순시하며 관리하게 했다(16). 또한 호조에 지시해 군량미 1만 석을 방출하게 하여, 쌀값 폭등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켰다(19). 한편,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14, 28).

 

정부의 신속하고 다각적인 대응 덕분이었을까. 기록적인 폭우에도 불구하고 피해는 크지 않았다. 세종의 위기 대응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오히려 홍수가 지나간 뒤에 취해진 사후조처였다. 정도전의 아들 한성부사 정진은 재난을 구하고, 환난을 방비하는 일은 국왕의 정치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이라며 도성 정비 방안을 제안하였다(세종실록 373). 세종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청계천 등 주요 수로를 깊고 넓게 정비하고,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는 등 종합적인 홍수 대비책을 채택해 곧바로 시행에 옮겼다.


이 시기 조정 신료들을 크게 긴장시킨 사건은 임군례의 난언이었다. 임군례는 귀화한 중국인[漢族]으로, 개국 공신 임언충의 아들이다. 역관으로 명나라를 오가며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권세 있는 자들에게 아첨하기를 즐겨, 당시 사람들은 그를 오방저미(五方猪尾)’, 곧 아무 데서나 꼬리를 마구 흔드는 돼지라 일컬었다. 그런 그가 관청의 물건을 도둑질하다 발각되어 파직되자 이따위 임금이 무슨 대체(大體)를 알겠는가라며 세종을 공개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태종이 아무 때나 이리저리 다니며 사냥하는 모습이 고려 말 우왕과 다를 바 없다고 조롱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태종이 병을 핑계로 왕위를 세종에게 넘긴 사실을 명나라 황제에게 알려 전위를 취소케 하겠다는 위험한 발언을 내뱉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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