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5호] 세종, 어린 시절 소외를 넘어 백성의 소리를 번개처럼 느끼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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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삶을 바꾼 ‘최초의 질문’
세종을 바꾼 전율의 순간을 떠올릴 때,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루터는 항상 번개가 바로 자신의 뒤에 떨어지려는 것처럼 의식했고, 그렇게 행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엄한 매질과 그에 동조하는 어머니의 냉혹한 태도 속에서 자랐다. 본래는 법률가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수도사의 길을 택했고, 안정된 성직자의 삶을 뒤로하고 순교의 위험이 따르는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인생의 전환점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1510년 가을, 로마로 떠난 순례의 길목에서였다.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Young Man Luther)』를 보면, 루터는 남부 독일을 지나 북부 이탈리아로 들어가며, 알프스 산맥과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로마에 도착한다. 매우 혹독한 날씨 속에서의 순례였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수많은 교회를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고, 그보다 먼저 순교한 사보나롤라—마키아벨리도 주목했던 인물—의 흔적을 쫓기도 했다.
사보나롤라는 물질만능의 세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개혁을 외쳤던 인물로, 비록 민중의 소요 속에 화형당했지만 루터는 그를 깊이 존경했다. “정말 존경스러운 수사였다”는 말로 그 감정을 표현한다.
이후 루터는 다른 순례자들처럼 라테란 교회의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고행을 이어가던 그는, 마침내 마지막 계단에 도달했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이렇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진리인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인가?” 에릭슨은 바로 이 순간을 루터가 ‘최초의 질문’을 던진 때로 보았다. 가톨릭 내부의 부조리—면죄부 판매와 같은 문제들—에 문제의식을 갖고, 루터가 본격적으로 회심의 길에 들어서는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번개가 바로 옆에 떨어지는 듯한 위기감을 루터가 갖게 된 계기와 관련해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그가 고향집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늘 냉정하고 쌀쌀맞았던 부모의 태도에 마음이 무거웠던 그는 집을 나서던 길목에서,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루터는 그 순간 이후로 언제나 삶의 위태로운 경계를 의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성가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루터는 갑자기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발작 증상으로 해석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급진적인 부정, 곧 ‘이전의 나’로부터의 결별을 뜻하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루터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후 법률가로서의 편안한 삶이나, 성직자로서의 안정된 길이 아닌, 순교의 위험을 무릅쓴 종교 개혁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세종 또한 위태로운 경계를 의식하며 살았던 인물이었다.그는 백성의 삶과 현실을 직접 마주하면서,겉으로는 모두가 조용히 따르는 듯해도 실제로는 고려가 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불안정한 나라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했다. 가뭄이 들어 흉작이 예상되거나 홍수로 민가가 떠내려갔다는 보고를 들으면 '하늘이 나를 꾸짖는다'며, 신료들에게 백성들에게 기쁨주는 일[悅民之事]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곤 했다.
조선이 건국된 지 채30년도 되지 않은 시점,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의 시대였다.그는 또한 자신이 실수하면,조선을 세운 할아버지와 아버지,그리고 왕위를 양보한 형까지 모두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된다는 책임감을 깊이 느꼈다.『세종실록』에서 자주 발견되는‘책임감’이라는 말은,그의 이런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이 무거운 책임과 소명의식은 그로 하여금‘왕’이라는 자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청년 루터가 라테란 교회 계단 앞에서 최초의 질문을 던진 순간,안정된 길을 버리고 순교의 위험이 따르는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섰듯,세종 또한 백성을 만난 다음부터 백성의 목소리를 번개처럼 감지하며 살아갔다고 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