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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야기 2] 세종이 말하고 실천한 ‘정치의 제1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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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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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랜드마크는 언제일까요?’

한국사를 대표하거나 분기 짓는 기준점이 언제라고 생각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은 굳이 역사에 그런 좌표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어느 시대건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땀과 눈물, 피와 희생이 깃들어 있는데, 굳이 어느 한 시기를 중심에 놓고 특별히 부각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역사의 랜드마크, 왜 필요한가?>

하지만 나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조망하기 위해서는 중심축 하나쯤은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모든 시기를 똑같이 바라보는 태도는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데 방해가 되기 쉽다. 한 시대를 기준점으로 삼아야만, 과거와 미래의 흐름이 비교되고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랜드마크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의 절대적 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의 방향과 동력을 읽을 수 있는, ‘역사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이탈리아를 예로 들어보자. 1,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도발국으로 참전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국으로 전향하거나, 끝내 패전국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근현대사의 궤적만 놓고 보면 부끄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여전히 배울 점을 찾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고대 로마라는 강력한 중심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로마 제국의 시작을 연 아우구스투스는 단지 인구를 크게 늘리고 공공사업을 진흥시킨 통치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제국 경영의 기틀을 만들고 정치 구조의 이정표를 세운 지도자로 기억된다. 이처럼 하나의 뚜렷한 기준점이 역사 서사의 중심을 잡아 줄 때, 후대는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정체성과 방향성을 확보할 수 있다중국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아편전쟁, 만주국 수립, 국공내전 등으로 점철된 청 말과 근현대사의 전개는 혼란 그 자체였다. 외침과 내란, 정권의 반복된 교체는 오랫동안 국가의 정체성과 권위마저 흔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중국사를 이야기할 때 당태종의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언급하고, 청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기를 중국의 전성기로 평가한다. 이는 단지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는 어떤 시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그와 같은 기준점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 5세기의 약 120년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374년부터 491년 사이의 고구려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대외 팽창과 내정 안정을 함께 이루며 제국 경영의 리더십과 기상을 드러냈다. 이 시기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한 국가의 이상적인 형세와 정치적 기개가 동시에 구현된 시기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숙고할 문제가 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중심축으로 삼기에는, 그 시대를 보여주는 사료가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구려인의 기개와 통치 능력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었고,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크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우리 역사에서 중심좌표로 삼을 수 있는 시기를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태종에서 시작해 세종으로 이어지는 약 50(1400~1450)을 들고 싶다. 특히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세종시대 32년간은 사료의 밀도와 통치 철학, 정책의 연속성과 실효성에 있어 단연 독보적이며, 전근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결정적 시기였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세종 시대를 우리 역사의 분수령이라 말할 수 있을까? 15세기 전반부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면, 여러 지점에서 분명한 변화의 흐름이 감지된다. 그중에서도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지도(地圖)’의 양상이다. 1402, 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두만강 부근의 국경선이 뚜렷하지 않으며, 백두산의 위치조차 명확히 표시되지 않는다. 반면 태종과 세종시대를 경과한 1481, 성종 12년에 완성된 팔도총도에서는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국경선이 분명히 그려지고, 백두산의 위상도 눈에 띄게 부각되어 있다. 국가 인식의 공간적 경계가 지도 위에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시대가 한국 문명의 축(pivot)’인 이유 4가지>

둘째로 주목할 변화는 언어, 특히 문자 생활의 전환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조선의 백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를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기록 수단이 하나 더 생긴 것을 넘어선다. 문자의 구조가 바뀌면 사고의 틀도 달라진다. 훈민정음은 조선 사람들의 언어 인식과 표현 방식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특히 한글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여성들이었다. 궁중과 양반가의 여성들,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일부 평민 여성들까지도 문자라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 사용의 확장은 곧 문화적 상상력의 확장이었다. 그것은 조선 사회의 표현 지형을 새롭게 그리는 조용한 혁명이었다.

세 번째의 변화는 바로 백성들의 삶의 질향상이다. 삶의 질을 측정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유교 전통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을 주목하고 싶다. 오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강녕한 삶(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제 명에 죽는 것(考終命)이다세종시대 사람들은 제문이나 헌사, 그리고 사람 이름에 이르기까지 오복을 자주 언급하며 이러한 삶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 백성들의 삶은, 이 기준에 비춰보아도 이전 시대에 비해 확연히 향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의 질병을 줄이고, 재해에 대비하며, 교육과 문화의 저변을 넓힘으로써 질 높은 삶의 조건을 마련했다. (* 자세한 내용은 박현모, “세종은 백성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였나?” <정신문화연구 2009 여름호 제32권 제2호를 참조하기 바람). 율곡 이이 역시 그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종시대에 이르러 국가는 안정되었고, 후손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만년 운의 기틀이 이때 마련된 것이다.”

네 번째의 중요한 변화는 민본(民本)’, 곧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사상이 세종시대에 들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구현되었다. ‘민본이라는 말은 본래 서경의 구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에서 유래했다. 단순한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군주가 백성을 얕잡아보면 결국 인심을 잃고 고립될 수 있다는 실천적 경고였다. 공자의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이상과, 맹자의 천자는 곧 민심을 얻은 자라는 통찰 속에서 이 사상은 민본주의라는 정치원리로 체계화되었다. 이런 인식은 조선 건국의 이념을 설계한 정도전에게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경제문감에서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 천자가 신하에게 관작을 내리고 녹봉을 지급한 것도 사실은 신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성인의 모든 동작과 제도, 명령과 법제는 하나하나 반드시 백성에게 그 근본을 두었다라고 말했다.

<세종이 실천했으며 한국정치사의 제1원리 된 민본사상>

중요한 것은, 민본주의가 단지 정치원리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실제 정치에서 구현된 첫 시기가 바로 세종 시대였다는 점이다. 세종은 백성을 나라의 뿌리’, 즉 근본으로 여겼고, 그 인식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신분이 낮은 백성조차 하늘이 맡긴 존재라며 존귀하게 여겼으며, 정책을 결정할 때에도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먼저 고려했다왕위에 오른 직후, 그는 즉위교서에서 시인발정(施仁發政)’, 먼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고, 그에 따라 정책과 제도를 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국가가 먼저 제도와 법령을 만들고 백성에게 따라오라고 강요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세종에게 정치는 명령이 아니라 경청이었고, 백성은 통치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길을 만들어가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 시대는 민본주의가 비로소 현실 정치의 원리로 기능하기 시작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선명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민본주의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과 제도 운영 전반에 깊숙이 반영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세제 개혁이다. 백성의 부담을 재조정하는 이 민감한 사안을 앞두고, 세종은 무려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의 의견을 직접 물은 뒤에 시행 여부를 결정했다. 백성을 정책 형성 과정에 실질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로 존중한 혁신적 접근이었다. 세종은 더 나아가, 백성들이 정책 판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보 접근권과 표현 수단을 확대했다. 당시 양반 지배층이 독점하던 문자 권력시간 정보를 일반 백성에게 개방한 것이다. 특히 전자,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창제해서 백성들 상호 간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며, 스스로 자기 죄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대표적인 민본주의 실천 사례이다.

세종이 생각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원칙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임금을 세운다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재위 13(1431), ‘수령고소금지법과 관련한 논쟁 중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하고자 함이 있었는데 임금이 없으면 어지러워지므로 반드시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다.”(세종실록 13620) 이는 왕권을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전통적 관념과는 결을 달리하는 인식으로, 백성이 정치의 시작점이라는 국왕 추대설이자, 정치 권위의 기원을 백성의 의지에서 찾은 선언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백성의 존재가 이토록 중심에 놓였던 시기는 과거에 없었다. 세종의 국왕추대론은 서구의 민주주의처럼 제도화되지는 못했지만, 그 정치 사유는 분명히 양방향으로 작동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왕과 신료들에게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언제든 정당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비록 상대가 왕이나 재상일지라도, 내가 이 나라의 뿌리이기에 그들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다는 자각과 비판의식을 심어주었다. 세종이 실천한 백성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는 민본의 통치이념은 이후 조광조, 이이, 정약용, 그리고 개화기의 안창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며,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의 제1원리(principia)’로 자리 잡았다.

<진정한 민본은 인기영합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하나 있다세종은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신념을 실천하면서도국가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더 큰 과업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는 백성들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해서반드시 시행해야 할 정책을 접지는 않았다재위 중반기, 4군 6진을 개척하며 북방 이주 정책을 추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일부 백성들은 팔을 자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까지 북방 이주를 거부했고대다수 신료들 역시 마천령 이북을 포기하더라도 민폐를 줄여야 한다며 개척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조종의 땅은 비록 한 치의 땅일지라도 버릴 수 없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대업을 이루는 자는 작은 폐단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끝내 떠도는 소문과 반대를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으로 확정지었다. 세종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그것에 매몰되어 국가를 강하게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본(民本)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뜻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백성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와 동일하지는 않음을 세종은 보여주었다.

세종은 에 멈추지 않고, ‘로써 그 이상을 실현한 지도자였다. “백성들이 자기 생업을 즐기는 나라[民樂生生]”을 만들기 위해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다. 재위 중반 이후 온몸이 병들고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한 번 세운 비전을 향해 멈추지 않고 설득하고 추진하고, 직접 확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백성들에게 문자와 시간을 선사하여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고, 세계 최고 수준 과학적 성과를 이뤄내 백성들이 안심하고 삶의 터전에서 즐길 수 있게 한 세종의 민본정치야말로, 가난과 독재를 딛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우뚝 서게 한 핵심 저력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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