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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서재 이야기(제 3호) l 와해보다 토붕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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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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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2024.09.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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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세종의 서재 이야기  

<치평요람(治平要覽)>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함께 대표적인 ‘세종의 책’입니다. 이 책은 세종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편찬 방향과 책 이름까지 왕명으로 정해진 ‘세종의 서재 으뜸 문헌’입니다. 1441년(세종 23) 6월 정인지는 “후세 자손의 영원한 거울[後世子孫之永鑑·후세자손지영감]”을 만들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약 4년간(46개월) 작업을 진행하여 이 책을  편찬했습니다. 15세기 최고의 인재인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리더십 이야기를 통해 '적실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높이시길 바랍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02년에 간행한 <국역 치평요람>을 사용합니다. - 편집자 주

와해보다 토붕이 더 무섭다

박현모(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요즘 한무제(漢武帝)를 재발견하는 기쁨이 큽니다. <치평요람> 제9권은 한무제, 즉 한나라 제7대 황제 유철(劉徹)의 즉위과정과 치세를 싣고 있습니다. 그는 5대 문제(文帝)와 6대 경제(景帝)에 이어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한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여놓은 군주입니다.

 

"위대한 군주가 연이어 등장하는 나라의 국운은 하늘로 치솟는다"는 마키아벨리의 역사통찰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3천 년을 살았다는 동방삭(東方朔) 이야기며, 서역의 대완 정벌로 가져온 천리마 한혈마(汗血馬) 이야기, 천인감응설로 유명한 동중서의 글도 흥미롭습니다.

 

무제를 재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한무제는 서역공략과 흉노정벌 등 외치(外治)에서 눈부신 치적을 거두었으나, 내치에는 실패했다는 종래의 설에 치우쳐서 그의 내치 부분을 잘 보지 않았던 저의 한계를 깨달은 점을 말합니다.


탁상공론 말고 실행가능한 방안을 듣고 싶다

오늘 아침에 읽은 <치평요람> 한무제 대목을 보면 서악(徐樂)이라는 사람이 올린 글이 눈에 띱니다. 한무제는 "관리나 백성 중에서 시무를 잘 알고 앞선 시대 뛰어난 인물들의 학술을 익힌 사람"을 수도로 불러 올렸는데, 상경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먹이되 회계 담당자를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회계담당자를 동행하게 한 이유는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저 탁상공론을 올리지 말고 실행가능한 방안을 함께 제시하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황제의 이 초빙 조서에 응해서 사방에서 100여 명이 대책(對策)을 올렸는데, 황제가 직접 읽고 쓸만한 것을 채택했습니다.

 

무종 사람 서악은 그 중의 한 명인데, 그는 한무제에게 "천하의 근심은 와해(瓦解)가 아니라 토붕(土崩)에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와해란 기와가 느슨해지고 깨져서 비가 새는 것입니다. 통치 계층의 내부 분열과 관료조직의 기강 문란을 뜻하지요. 토붕이란 흙으로 쌓은 토대가 무너진다는 뜻으로, 민심이 심각하게 이반되는 등 사회 기층이 붕괴됨을 의미합니다.

 

토붕의 원인은 세 가지로 그 첫째는 백성들의 고달픔을 군주가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그 둘째는 아래에서 원망하는 말을 위에서 듣지 못할 때, 그 셋째는 나라가 이미 어지러워졌는데도 조정에서 대책을 세워 강구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9권 159쪽).

 

이렇게 볼 때 세종이야말로 와해보다 토붕의 무서움을 알고 대비한 임금이었습니다. 기왓장을 고정시켜 지붕을 정비해 놓은 부왕 태종의 노력 덕분에 와해의 염려는 크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위에 오른 뒤 그는 "과인이 궁중에서 자라서 민생의 간고(艱苦:가난하고 고생스러움)함을 잘 알지 못한다"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수령들에게 지시했습니다.

 

태종시대 만들어진 신문고를 넓게 개방하고 경차관이란 관원을 파견하여 수령들의 보고가 맞는지 확인하는가 하면, 백성들이 힘들게 농사짓는 모습을 병풍에 그려서 마음에 새기곤 하였습니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민생 파악에 집중함)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면서 왕과 관리가 일하는 이유가 뿌리에 해당하는 백성들을 키우고 보살피는데 있음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민유방본이라는 유교경전의 구절을 따다 정치적 수사(修辭) 차원에서만 얘기하는 많은 정치가들과 그는 달랐습니다.

 

"원래는 왕도 수령도 없었다. 백성들끼리 살다가 혼란이 생기자 필요에 의해 왕을 추대했다"고 하여 뿌리의 의미를 상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잘 안 보이지만 뿌리가 흔들리거나 썩어가면 땅 위의 나무 줄기 열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란 엄중한 자기 각성이었지요.

 

세종은 국가의 존재 이유(why)를 잊는 순간 토붕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농사직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백성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향약집성방> 등 의약서를 편찬하게 했지요. (민생 대책을 세워 강구함)

 

세종의 토붕방지책

땅을 견고하게 만드는 세종의 방법은 다른 왕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백성을 먹이고 건강하게 만드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는 구성원을 지혜롭게 만들려 애썼습니다. 문자를 만들어서 억울한 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게 하고,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유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했지요.

 

'백성 수준이 높아져야 국격이 올라간다'고 본 세종은 재위기간 내내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민생경영은 물론이고 음악과 과학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혁신하여 그 성과를 백성들과 더불어 즐겼지요.

 

지금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어떤가요? 5년 임기의 대통령은 와해를 단속하느라 땅이 꺼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기업의 CEO 역시 눈앞의 일에 쫓겨서 고객경험을 높이는 일이나 미래먹거리 준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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