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세종의 서재 이야기
<치평요람(治平要覽)>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함께 대표적인 ‘세종의 책’입니다. 『치평요람』은 세종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편찬 방향과 책 이름까지 왕명으로 정해진 ‘세종의 서재 으뜸 문헌’입니다. 1441년(세종 23) 6월 정인지는 “후세 자손의 영원한 거울[後世子孫之永鑑·후세자손지영감]”을 만들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약 4년간(46개월) 작업을 진행하여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15세기 최고의 인재인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리더십 이야기를 통해 ‘적실하게 판단하고 효과적으로 일을 추진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02년에 편찬한 <국역 치평요람>을 사용합니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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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평요람> 제4권에 실린 정(鄭)나라 자산(子産)의 졸기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관자, 안영과 함께 중국 춘추시대 3대 재상으로 꼽히는 자산의 인재쓰기와 비판에 대처하는 법, 그리고 국가경영 원칙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 정자산(鄭子産)은 강점경영, 즉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게 하는 [各以所長 각이소장] 인재쓰기를 했습니다. 예컨대 다른 나라와 외교문제가 생기면 “자우에게 사방 여러 나라의 사정을 묻고, 비심과 함께 수레를 타고 들에 나가서 해당 계책의 가부를 결정하고, 그 계책의 예상되는 결과를 풍간자에게 모두 말해 보게” 했습니다. 국제정세를 잘 아는 자우의 강점, 전략을 세우고 계책을 마련하는데 뛰어난 비심의 강점, 그리고 종합적 안목으로 실익 계교를 잘하는 풍간자의 강점을 모두 사용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외교 정책이 결정되면 (외모가 준수하고 말솜씨가 뛰어난) 자태숙에게 위임하여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국역 치평요람> 3권 1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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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3대 재상 정자산이 '비판에 대처하는 방법' 둘째, 정자산은 비판의 본질을 꿰뚫고 그에 맞는 대처를 하였습니다. 정나라 사람들이 향교에 가서 놀면서 위정자들의 잘잘못을 논하자 어떤 사람이 향교를 없애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자산은 “어찌하여 향교를 없애려 하시오? 사람들이 위정자의 잘잘못을 말함은 자연스럽고, 그중 좋은 말은 내가 받아들여 시행하면 되며,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내가 고치면 되오. 그들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소.”라며 거절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위엄을 부리어 원망을 막음은 마치 강물 막는 것과 같아서, 결국엔 크게 터져서 사람들을 많이 다치게 한다”면서, 설사 비방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작게 터서 통하게 해놓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 (<치평요람> 3권 138-139쪽)
셋째, 정자산은 나라를 다스릴 때 관대함과 엄격함을 조화시키되, 엄격함을 순서상 먼저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새로운 세금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사람들은 정자산의 부모 자식까지 비방하며 극구 반대했습니다. 이 비방을 전해 들은 정자산은 “그런 비방이 있다 한들 우리 집안에 뭐가 해롭겠소? 다만 나라에 이로우면 죽든 살든 시행할 것이오. 법과 제도를 쉽게 고쳐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백성들이 나라 정책을 자기 이해에 따라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소”라며 강행했습니다. (<국역 치평요람> 3권 193~194쪽) 또한 국가에서 형벌 제도를 제정해 시행하려 하자 반대하는 말들이 쇄도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다투는 마음을 품어 형법을 끌어대어 근거로 삼아 요행이 성공하길 바랄 것'이라는 게 반대 논지였지요. “백성들이 장차 예의는 버리고 그저 형법 책에서 근거를 찾아 송곳 끝처럼 작은 일까지도 죄다 다투려 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습니다. 나중에 공자에 의해서도 비판받았던 형벌제도 제정은 법가와 유가의 오래된 논쟁거리이기도 합니다 (공자 - “백성들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반대에 대해서 정자산은 “나는 재능이 없어 자손시대의 일까지는 생각할 수 없고, 다만 내가 당면한 나라의 처지를 구제하려면 이렇게 할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달라”고 대답했습니다. (<국역 치평요람> 3권, 194~196쪽). 정자산이 죽기 전에 아들 자태숙에게 '물과 불의 비유', 즉 불은 맹렬하여 사람들이 무서워하여 피하므로 타죽는 일이 드물지만, 물은 물러보여서 백성들이 깔보고 장난치다 죽는 일이 많다면서 “관대한 정치는 어렵다[寬難 관난]”고 유언한 일은 <세종실록>에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백성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 알려주고(엄격함), 그 선 안에서 발생하는 실수와 비판은 관대하게 포용한다(향교 철폐 때처럼)는 원칙으로 그는 나라를 이끌어갔습니다. (<국역 치평요람> 4권,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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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사람들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 결과는 어땠을까요? 다음은 집현전 학사들이 인용한 사마천의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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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이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젊은 애들이 버릇없이 구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됐다. 2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물건값을 속이는 일이 없어졌다.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됐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을 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예를 갖추었다.”(<국역 치평요람> 3권, 1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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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나라가 위태롭고 약하여 거의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처했던 (<국역 치평요람> 4권 83쪽) 나라를 바꾸어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생생지락의 국가'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세종시대 지도자들은 정자산의 정치를 배우려 했던 것 같습니다. 세종26년 <농본교서>에 나오는 '좋은 국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각자 일터에 나가 신명 나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 어버이를 우러러 섬기며, 자녀를 사랑으로 길러서 모든 백성의 생명이 장수(長壽)하는 나라’가 바로 그렇습니다.
황희나 허조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정자산 같은 재상이 더욱 그리운 요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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